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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56년만에 건국훈장 박탈된 김성수... 남은 과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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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2-14 09:55 조회7,58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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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해설] 김성수 공적자료 삭제, 동상 철거, 고대 앞 '인촌로'폐지 등 후속조치 필요


    

인촌 김성수
 인촌 김성수



<동아일보> 창업주 인촌 김성수(金性洙, 1891~1955)가 정부로부터 받은 건국훈장이 박탈됐다. 정부는 지난 13일 국무회의를 열어 인촌이 받은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 현 건국훈장 대통령장, 2등급)의 취소를 의결했다. 1962년 서훈을 받은 지 56년만이다.

독립유공 포상 주무부처인 국가보훈처는 지난 1월 8일 상훈법 제8조 1항 1조에 의거해 인촌의 서훈 취소 건에 대해 심사를 요청했다(상훈법 제8조 1항 1조는 '서훈 사실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 이를 박탈하도록 규정함). 이에 대해 상훈업무 주무부장관인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날 국무회의에 상정했고, 관련법에 따라 이날 취소 결정이 내려졌다. 훈장의 수여와 박탈은 대통령 고유권한이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이듬해 3.1절을 앞두고 대대적인 독립유공자 포상을 실시했다. 해방 후 정부 차원의 독립유공자 포상은 이때가 처음이다. 당초 발표는 208명(<경향신문> 1962년 2월 24일 보도 참고)이었는데, 공적심사는 문교부와 내각사무처에서 맡았다. 인촌 김성수도 이때 훈장을 받았다.

(서훈 취소와는 별개로 인촌이 받은 건국훈장 2등급은 격에도 맞지 않아 보인다. 보훈처가 펴낸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인촌은 '문화운동' 방면의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여기서 문화운동이란 <동아일보> 창간, 물산장려운동 참여, 소위 '일장기 말소사건' 등을 일컫는다. 참고로 백암 박은식(朴殷植) 선생, 친일미국인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張仁煥) 의사, '여자 안중근' 남자현 의사 등이 2등급을 받았으며, 3.1혁명의 상징인 유관순(柳寬順) 열사는 3등급 독립장을 받았다. - 기자 주)

대법이 확인한 '친일 김성수'

1962년에 정부 차원의 첫 독립유공자 포상이 실시됐는데 인촌 김성수도 이때 건국훈장을 받았다. (경향신문, 1962.2.24)
 1962년에 정부 차원의 첫 독립유공자 포상이 실시됐는데 인촌 김성수도 이때 건국훈장을 받았다. (경향신문, 1962.2.24)



정부의 이번 서훈 취소는 2017년 4월에 있은 대법원 판결에 따른 후속 조치로 취해진 것이다. 당시 대법원 1부(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과 재단법인 인촌기념회가 행정자치부장관을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인촌 김성수의 친일행적이 뚜렷함에도 <동아일보> 측은 친일규명위의 결정에 대해 취소소송을 냈다. 1심은 인촌의 친일행위를 인정했고, 인촌 측은 즉시 항소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은 쉬 열리지 않았다. 무려 4년 2개월 만에 이뤄진 2016년 1월의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1심의 판단이 맞다"라면서 원고의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그러자 이들은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고, 대법원은 하급심 판결을 모두 인용했다.

참여정부 시절 '제2의 반민특위'로 불린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지난 2009년 총 1005명을 '국가 공인' 친일파로 선정한 바 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서 7000명을 조사대상자로 삼았던 데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숫자다. 이는 친일규명위 설립의 근거법인 '일제강점 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은 철저한 증거주의를 채택하고 있어서 당연범을 인정하지 않은 때문이다. 언론인 출신으로는 인촌과 함께 <조선일보> 사장을 계초 방응모(方應謨) 등이 이에 포함됐다.

역대 독립유공 서훈자 가운데 친일 행적이 드러나 논란이 된 경우가 많았다. 필자가 보훈처에서 확인한 바로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초창기에도 공적조서에 '변절 여부' 항목이 존재했었다. 그런데 1990년대 이전에는 친일파 연구 성과도 별로 많지 않았던 데다 이런저런 이유로 공적조사 및 심사가 부실했던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극단적인 예로는 완벽한 가짜 독립운동가도 있었으니 두 말해 뭣하랴.  

언론인 출신 중 서훈 취소자는 3명... 서춘, 장지연 그리고 김성수

정부가 친일 전력자들에게 수여한 훈장을 박탈한 경우가 두 차례 있었다. 1996년에 5명의 서훈을 취소했으며, 2011년에 19명을 추가로 취소했다. 대표적 인물로는 이승만 비서 출신으로 초대 내무부장관을 지낸 윤치영(尹致暎), 불교계의 거물로 꼽히는 이종욱(李鍾郁) 등이다. 그러나 단골로 대상자로 거론됐던 인촌은 이때도 빠졌다. 사유는 '재판 중'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언론인 출신 가운데 서훈이 취소된 인물로 세 사람을 들 수 있다. 인촌 김성수를 비롯해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송대곡'을 써 널리 이름을 알린 위암 장지연(張志淵), '2.8독립선언'에 참여했으나 나중에 변절해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주필이 돼 친일 논설을 쓴 서춘(徐椿) 등이다. 서춘은 1996년, 장지연은 2011년에 각각 서훈이 취소됐다(서춘의 경우 대전 국립묘지에 묘가 있었는데 이장하라는 여론의 압력 끝에 결국 2004년에 후손이 묘를 이장함).

인촌 김성수의 친일행위는 구체적이고 다양하다. 인촌은 소위 '실력양성론'을 표방한 우파 민족진영에서 활동했는데 총독부의 '문화통치'에 발맞춰 일제와 타협했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던 춘원 이광수(李光洙)가 <동아일보>에 쓴 '민족적 경륜'(총 5회,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같은 궤변적 칼럼도 그 한 예다. 사이토(齋藤實) 총독이 남긴 '사이토 문서'에 따르면, 인촌의 오른팔이자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고하 송진우(宋鎭禹)는 한 달에 한번 꼴로 사이토를 만난 걸로 나와 있다.

'내선일체'를 내걸었던 <동아일보>

일제 당시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에 내걸린 '내선일체' '보도보국' 현수막들.
▲  일제 당시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에 내걸린 '내선일체' '보도보국' 현수막들.



<동아일보>가 창간 초기에 총독부로부터 여러 차례 무기정간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 발발 이후 <동아일보>는 친일성향의 보도를 밥 먹듯 했다. 대표적으로 일본군을 '아군(我軍)' '황군(皇軍)'이라고 표현했다. 일제 말기에는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현 일민미술관 건물)에 '내선일체(內鮮一體)' '보도보국(報道報國)'이라고 쓴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다. 그럼에도 <동아일보>는 아직도 '민족지'라고 외친다.

인촌 개인의 친일 행적도 적지 않다. 일제의 침략전쟁 당시 전시동원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이 단체의 후신인 국민총력연맹 이사, 흥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의회가 통합한 조선임전보국단 감사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인촌이 이런 단체에서 어떤 활동했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각종 일제 당시의 문헌에 이름이 올라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민족지' <동아일보> 사주인 인촌이 조선총독과 주고받은 편지도 더러 남아 있다. 1990년대 중반 필자는 일본 의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서 편지 몇 통을 입수한 바 있다. 그 가운데 사이토 총독이 병으로 총독에서 물러나 일본에 체류하고 있을 때 인촌이 보낸 편지(1930년 12월 30일)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에 건강이 좋지 않아 조선을 떠나시게 된 것은 정말로 유감스럽습니다. 각하가 조선에 계시는 동안에 여러 가지로 후정(厚情)을 입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경성방직 회사를 위해 특별한 배려를 받은 것은 감명해 마지않으며, 깊이 감사 말씀 올립니다. 석별의 정으로 별편(別便)에 조촐하지만 기국(器局)을 하나 보냅니다. 기념으로 받아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인촌 김성수와 사이토 조선총독 간에 주고받은 편지. 왼쪽이 인촌이 보낸 편지(1930. 12.30)이며, 오른쪽은 이듬해 1월초에 사이토가 보낸 답신이다.
▲  인촌 김성수와 사이토 조선총독 간에 주고받은 편지. 왼쪽이 인촌이 보낸 편지(1930. 12.30)이며, 오른쪽은 이듬해 1월초에 사이토가 보낸 답신이다.



일제 말기인 1943년에는 조선인 대학생들에게 학도병으로 나가라고 촉구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매일신보> 1943년 11월 7일 치에 실린, <학도(學徒)여 성전(聖戰)에 나서라> 시리즈 세 번째로 쓴 '대의(大義)에 죽을 때 황민(皇民) 됨의 책무(責務)는 크다'는 기고문이 그것이다. 인촌 측은 이 글은 <매일신보>가 조작해서 쓴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는데 납득하기 어렵다. 객관적으로 인정할만한 증거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서훈 취소 그후
 
인촌을 둘러싼 친일 논란은 대법원 판결과 정부의 서훈 취소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후속으로 취해야 할 과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몇 사례를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공적자료 삭제 문제다. 정부기관의 독립유공자 관련 자료 가운데 김성수를 즉시 삭제해야 한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의 '독립유공 공훈록'에는 14일 오전 현재 6명의 '김성수' 가운데 네 번째로 이름과 공적내용이 실려 있다. 또 정부가 구축한 '공훈전자사료관'에도 여전히 김성수가 남아 있다. 이 역시 즉시 삭제조치 해야 한다.

과천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인촌 김성수 동상
 과천 어린이대공원에 있는 인촌 김성수 동상



둘째, 동상 철거 문제다. 전북 고창에 있는 인촌의 고택이나 광화문 동아일보사 1층 로비에 있는 인촌 동상은 차치하더라도 과천 어린이대공원, 고려대 본관 앞, 중앙고 교정에 있는 인촌 동상은 교육상 철거가 마땅하다고 한다. 이화여대생들이 김활란(金活蘭) 동상 철거운동을 벌인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과천 동상은 1991년 10월 11일 '인촌 김성수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건립함).

셋째, '인촌로' 폐지 문제다. 인촌의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군 관내와 서울 성북구 고려대 인근 도로는 '인촌로'로 불린다. 모두 인촌 김성수와 관련된 것이다.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회장 함세웅)는 지난해 대법원 판결 직후 행정자치부와 전북 고창군, 성북구청에 공문을 보내 '인촌로'를 폐지할 것을 요청했으나 여태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있다.

김성수의 호 '인촌'을 따서 지은 '인촌로'. 작년 대법원 판결 직후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는 '인촌로' 폐지를 주장하였다.
▲  김성수의 호 '인촌'을 따서 지은 '인촌로'. 작년 대법원 판결 직후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는 '인촌로' 폐지를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