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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전남일보] 임정ㆍ의용대 묘지 화상山에 "조선화"는 피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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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8-16 09:45 조회9,90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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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충칭시 남안구 탄자석 약산 김원봉의 주거지. 남안구 일대에는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본부가 있었으나, 모두 사라졌다. 약산이 머물던 옛집이 그나마 남았으나 언제 헐릴지 모를 처지다.(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5년1월부터 8월까지 집무했던 충칭 연화지 청사입구(아래 왼쪽)와 전시실로 바뀐 내부에 김구 선생 흉상이 있다.


임정ㆍ의용대 묘지 화상山에 '조선화'는 피어 있는지...

청사 4곳 중 3곳 흔적 없고 연화지만 유일하게 보존

박근혜 정부 무관심 속에 광복군사령부 건물도 철거

조선의용대 김원봉 주거지 재개발에 곧 헐릴 지경


3ㆍ1만세 투쟁으로 세운 대한민국. 1919년 거족적인 만세 투쟁은 한반도의 국체(國體)를 조선-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바꾸었다. 투쟁선언문은 '조선이 독립국이며, 자주민'임을 선언했다. 전 민족이 독립을 선언했으니, 독립국 정부가 필요했다. 임시정부는 그렇게 1919년 4월11일(국가기념일은 13일)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그들이 마지막 정착한 땅이 양쯔강과 가릉강이 만나는 충칭이었다. 1940년 장제스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인 충칭은 인구 20여 만 명의 작은 도시였다.

대한민국 임정은 1940년 4월부터 45년 8월 해방까지 5년여를 충칭에 머물렀다. 충칭시기 임정은 혁혁한 광복 사업을 전개했다. 광복군을 창설(40년)하고 대일 선전포고에 이어, 연합국의 일원으로 중국, 인도, 버마전선에서 전투에 참여했다. 일본 패망이 눈에 보이자 건국강령(41년)을 발표했으며, 김구, 김원봉, 김성숙, 나월환 세력의 통합도 시도했다. 모든 항일 세력의 통합과 끈길진 외교활동을 펼쳐 한국의 즉각 독립(1943년 카이로 선언)을 보장받기도 했다.

충칭은 한국 광복의 탯줄에 다름아니다. 그곳에는 27년 대륙을 전전하면서도 독립정신을 지킨 선열의 혼이 머물고 있으며, 시내 전역 12곳에 항일의 유적이 서려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정부의 무관심 등으로 충칭 항일 유적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임정 청사ㆍ 광복군 사령부

충칭 시기 임정은 모두 4곳에서 집무한다. 흔히 첫번째인 양류가, 두번째 석판가, 세번째 오사야항 청사로 불린다. 1,2번째는 일본군 폭격으로, 3번째 청사는 아파트와 상가가 들어설 예정으로 사실상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오사야항 청사는 있던 자리는 재개발이 한창이었다. 부지 앞 부분은 모두 헐리고, 뒷부분만 남아 있는데 그나마 곧 개발이 시작된단다. 현장 관리인은 "이곳이 한국 독립단체의 건물이 있던 자리로 알고 있다"면서 "충칭시에서 2년 후에 일부 보존,복원하려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1945년 1월 부터 8월까지 사용했던 연화지 청사만이 온전히 보전돼 있다. 이곳은 원래 판바이릉이라는 중국인 소유 호텔이었는데,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를 위해 지원해준 돈으로 세를 주고 빌린 것이다. 고 장준하 선생은 항일 자서전 '돌베개'에서 연간 1천만원의 세를 주고 들어왔다고 소개했다.(70년대 우리 돈으로 1천만원) 청사는 모두 5채로 각 건물마다 임정의 각 부서가 근무했다. 국무회의실과 임시의정원도 갖춰 정부 청사다운 면모를 보였다.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은 헐리고 없었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충칭시 정부가 4~5년 전 민간 개발업자를 압박해 총사령부 건물을 보존하려고 상당히 애를 썼지만 우리측의 무관심으로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다"고 말했다. 당시 충칭시는 정홍원 박근혜 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면담한 자리에서 보존 방안을 제시했으나, 한국 정부가 별다른 후속조치를 내놓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충칭시는 사령부 건물 복원과 한국문화의 거리 조성을 계획했으며, 사령부에 '한인 항일무장 전시관'을 꾸미려 했다고 한다.



● 약산 김원봉 선생 주거지

충칭시 남안구 탄자석 대불단정가 150호 김원봉의 주거지도 곧 헐릴 지경이다. 충칭의 옛 허름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곳은 주거지 입구까지 재개발이 한창이다. 김원봉은 이곳에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를 지도했다. 그는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한데 이어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설립(난징ㆍ정율성 2기 입학), 1938년 조선의용대 창건(우한) 등 항일무장투쟁의 거두였다. 일제는 김구 주석에게는 6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었지만, 김원봉은 100만원(현재 320억원)을 붙일 정도로 그의 위상은 대단했다.

150호 주거지는 3층 건물로 2개의 건물이 맞붙어 있었다. 1층은 미용실이나, 2,3층은 비어 있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무너질 것만 같다. 충칭의 상징처럼 이 집도 19개 계단을 올라서야 3층으로 이동할 수 있다. 충칭에는 '집만 나오면 계단을 밟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약산의 정치조직인 조선민족혁명당과 군사체인 조선의용대 본부가 있던 남안구 탄자석 묘배타 81호도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의용대 주력은 화북으로 떠나고, 본부병력만 충칭에 남았는데, 그들은 중국인 별장인 손가화원에서 주둔하면서 훈련했다. 이곳 기와집에서 김구 선생의 모친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화상산 한인묘지

충칭 남안구 탄자석 인가만에 한인들의 묘지가 있었다.임정 요인 송병조, 차리석, 이달, 손일만 선생이 이곳에 묻혔다. 또 김구 어머니인 곽낙원 여사와 장남 김인도 여기에 잠들었다. 요인들 외에 20여명의 조선의용대 대원들도 순국했다고 하는데 아파트 숲으로 변해 버렸다.

예전 화상산에는 알 수 없는 꽃이 피었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그 꽃이 중국에서는 피지 않아 조선화(朝鮮花)라불렀다. 김구 선생은 폐병으로 죽은 큰 아들 김인을 묻으러 여기에 왔다. 임정 요인들도 거의 폐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충칭은 예로부터 이슬비, 운무의 도시라 했다. 오죽했으면 촉견폐일(蜀犬吠日)이라 했을까. '촉나라 지방 개들은 해를 보고 짖는다'는 것인데, 해를 보지 못해 나온 말이다. 습한 날씨와 이슬비는 노인들에게 치명적이었다.

백범의 장남도 폐병을 앓았다. 그 때 페니실린이 발명돼 미국에 요청하면 그 약을 구할 수도 있었다. 백범의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남편을 살려달라고 하소연했다. 백범은 그 귀한 약을 구해 내 자식만 살릴 수 없다고 뿌리쳤다.

임정 27년사에서 충칭 연화지 청사 시절이 가장 편했다고 한다. 그 때 임정과 광복군, 의용대, 토교대 대원들은 밥을 쪄 콩나물 국에 넣은 뒤 소금을 타서 먹었다고 한다. 말이 콩나물이지 실상 멀건 소금 국이었다. 난징 시절에는 거지나 다를 바 없었다. 항저우 시절에는 밥 먹을 돈이 없어 가장 싼 '고량주'(일명 빼갈)을 나눠 마신 뒤 취해 잠들었다. 취기로 허기를 잊었다.

김갑제 광복회 광주전남연합지부장은 "오늘 대한민국의 뿌리는 모두 조국을 되찾겠다고 청춘을 바친 독립운동가 덕분인데, 그 분들의 자취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모두 사라져 간다"면서 "지금이라도 한ㆍ중 공동으로 항일투쟁의 현장을 보존하고,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양쯔와 가릉강이 휘감아 도는 운무의 도시 충칭, 그곳에는 27년 풍찬노숙에도 꿋꿋하게 독립의 염원을 지킨 항일투사들이 숨쉬고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화상산 조선화는 여전히 장강의 바람에 하늘거릴것이다. 꽃향기는 만리를 넘어 항일의 도시 광주에도 퍼지리라.

충칭=글ㆍ사진 이건상 기획취재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