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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뉴스1] "우당 이회영 처형·자결설 근거 부족…고문사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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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5-25 11:27 조회9,48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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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 6형제 망명 직전 회의 장면 초상화(우당기념사업회 제공)? News1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수많은 항일투사를 키워낸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1867~1932)의 순국 원인은 일제경찰의 고문이 확실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19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우당 탄생 15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황춘화(黃春華) 중국 지린(吉林)성 교원연구원 교수는 우당 순국원인에 대한 여러 학설을 검토하고 이같이 밝혔다.

지금까지 우당의 순국 원인은 일제경찰 고문설이 유력했으나 처형설과 자살설도 제기돼왔다.

처형설은 김월배(金月培) 다롄(大連)외국어대학 외국어학원 교수의 '뤼순(旅順)감옥에서 순국한 한국독립운동가'라는 글에 나온다. 여기 예로 소개된 독립운동가는 우당을 비롯해 안중근, 신채호와 한인애국단의 최흥식·상근,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등이다. 자살설은 1932년 11월17일 중앙일보에 '16일 밤 마침 당직이던 후쿠다 고등계 주임이 밤11시부터 2호 구류소에서 그(우당)를 조사하였는데 17일 오전 9시20분 그가 돌연 자살하였다'는 대목에 근거한다. 24일 동아일보 보도에도 '다롄경찰서에 구류 중이던 중 돌연 목을 매 자살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황 교수는 '뤼순일아감옥실록'에 따르면 1906년부터 1936년까지 이 감옥에서 사형당한 한국인은 12명이며 모두 55세 이하라는 점을 들어 처형설을 반박했다. 우당의 순국 당시 나이는 65세다.

자살설은 우당의 당시 상황과 성품을 들어 근거가 없다고 비판했다. 전 가산을 처분하고 모든 가족과 중국 동북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벌인 그의 지사적 성품을 볼 때 자결을 선택할리 만무하다는 주장이다. 수갑을 채우고 혹독한 고문을 하는 일제경찰의 수법상 자살할 만한 기회나 도구를 가질 가능성이 적다고 봤다. 

이에 견줘 우당이 뤼순감옥에 수감된 후 고문으로 순국했다는 비서 김소묵의 증언과 당시 시신을 확인했더니 핏자국이 가득하고 도포도 모두 피로 물들어 있었다는 이규추(李奎樞)의 목격담이 설득력이 있다는 분석이다. 황교수는 "우당은 당시 65세의 고령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각지를 떠돌며 생활한 탓에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우당은 아나키스트라기보다 자유주의 사상가였다는 연구결과도 발표됐다. 손과지(孫科志) 중국 푸단(復旦)대 역사계 교수는 "1920년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한인 애국지사 가운데 적지않은 사람들이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았으나 아나키즘을 하나의 독립운동 방략 또는 수단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상 아나키스트와 거리가 있었다"며 "이회영의 사상도 아나키즘과는 큰 거리가 있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 동안 분투한 독립운동가이며 민중의 평등과 자유를 추구한 자유주의 사상가"라고 평가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은 1907년 헤이그밀사 파견을 주도했으며 1910년 을사늑약 후 가산을 정리하고 중국에 망명해 수많은 항일투사를 배출한 신흥무관학교를 건립했다. 1932년 중국 다롄에 잠입 중 일제경찰에 체포돼 11월17일 뤼순감옥에서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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