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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전남일보]120여명 군청색 군복들 "식민지 노예로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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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항단연 작성일15-08-07 09:20 조회9,62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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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여명 군청색 군복들 "식민지 노예로 살 수 없다"
[3부 대륙을 울린 항일전사들] <2> 우한-열혈 불꽃 '조선의용대'

1938년 10월10일 우한
중국 관내서 창설한
우리 민족 최초 항일군대
중앙군관학교 졸업 엘리트들
2개 구대ㆍ대본부 편재
총대장 약산 김원봉
정보수집, 후방교란 등 큰 전과
사회주의 독립단체 통합한
조선민족전선연맹 핵심 세력
 
 
중국 후베이성(湖北省)의 성도, 우한(武漢). 인구 1050만명의 거대 도시는 장강을 품고 있었다. 양쯔강으로 알려진 장강은 강이 아니었다. 강이라고 하기엔 강 너머가 잘 보이지 않았다. 황토 물빛에 비끼는 물안개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치 해협을 가로지른 듯한 현수교로 강폭을 가늠할 뿐이다.

장강은 항일사에 여러번 등장한다. 님웨이즈 저서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을 배웅한 포구가 바로 양쯔강이었고, 대장정에 나선 홍군이 특공대까지 결성해 도강했던 곳이 바로 장강이었다. 무슨 강 하나 건너는데 특공대까지라는 의문은 우한에서 순식간에 풀렸다. 도도하게 흐르다가 때론 격랑이 치고, 1만톤 급 외항선이 오가는 장강은 강이 아니었다. "중국에서는 저 정도 돼야 강이라고 하나봐" 일행의 조크에 폭소가 터졌다.


"우리는 식민지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는 수천 수백만 동포를 일깨워 조선의용대의 깃발 아래 결집시키고, 파시즘 군벌의 압박하에 전 민중과 연합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여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를 이루려 한다. 조선의용대의 깃발을 높이 들고 용감한 중국 형제들과 손을 맞잡아 필승의 신념으로 정의의 항일 전선으로 용감히 전진하자."

1938년 10월10일 우한시 우창(武昌)구 자양로(紫陽路) 234호 대공중학교 강당(현 호북성총공회ㆍ湖北省總工會). 120여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군청색 군복을 입고 비장하게 서 있었다. 대원들은 중국 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단을 졸업한 엘리트들이었다. 강단에는 기라성같은 인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조선민족혁명당 대표 약산 김원봉, 조선민족해방동맹 운암 김성숙, 조선청년전위동맹 김학무, 무정부주의자 류자명,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장 진성(陳誠), 비서장 하충한(賀衷寒), 부부장 저우언라이(周恩來), 정치부 제3청장 궈머루(郭沫若)가 대원들을 응시했다. 저우언라이는 동방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에 대해 연설하고, 궈머루는 문인답게 축시로 의용대의 무운장구를 기원했다.

창립식이 열리는 동안 가끔 포성이 터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포성은 점점 가깝게 들렸다. 대원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3대 구호를 제창했다.

"하나, 중국에 있는 조선혁명역량을 총동원하여 중국항전에 참가한다. 하나, 일본의 광대한 군대가 동북의 약소민족을 침략한 것에 공동으로 일본군벌을 타도한다. 하나, 조선혁명운동은 태동하여 조선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한다."

일제는 상하이, 난징을 거쳐 화중 지방의 중심지 우한을 겁박했다. 우한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 대륙에서 손꼽히는 하항(河港)으로 상업중심지다. 대원들은 잦아지는 포성에 전투가 임박함을 절감했다. 창설과 동시에 전선으로 뛰어나가야 할 운명….

창립식이 끝난 뒤 10월13일 한커우 기독교청년회 강당에서 경축행사가 열렸다. 아리랑 합창과 '두만강변'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약산 김원봉이 단상에 섰다.

"과거 중국의 혁명 때마다 조선인민은 참가하였고, 특히 동북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다. 조선은 분명한 태도로 항전에 참가하고 있다. 우리가 적다고 여기지 말라, 삼천만 민중 모두가 우리의 역량이다."(1938년 10월14일자 신화일보)

조선의용대 창립 대원은 120여명으로 총대장은 약산 김원봉이 맡았다. 의용대는 2개 구대로 편성됐다. 제1구대는 43명으로 구대장 박효삼에 정치지도원 왕통이 임명됐다. 제2구대는 41명에 구대장 이익성, 정치지도원에 김학무가 선임됐다. 대본부 인력까지 포함하면 실제 무장병력은 97명으로 알려져 있다. 1939년 대원이 300여 명으로 증가하자 제3구대를 만들어 한지성을 지대장으로 뽑았다. 조선의용대 지휘체계는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위원장 장제스) 정치부(부장 진성ㆍ부부장 저우언라이)-한ㆍ중 지도위원회(4:4명)-조선의용대 본부로 이어졌다.

주요 활동은 일본군에 대한 정보수집, 일본군 포로 취조 및 교육, 대 일본군 선전공작, 후방교란, 중국군 및 조선ㆍ중국민중에 대한 선전활동이었다.

베이징 대학 박사과정 중인 정원식씨는 '타이항산 아리랑' 저서에서 "조선의용대는 편제상 중국 군사위 지휘하에 있는 국제부대임과 동시에 김원봉 선생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자율성과 독립성을 확보한 민족독립군 성격을 지닌 항일레지스탕스 전위부대"라고 정리했다. 중국 관내에서 창설한 우리민족 최초의 항일군대가 바로 조선의용대였다.

조선의용대 창설은 중국 관내 중도좌파 독립단체의 통합이 기초가 됐다. 1937년 7월7일 중ㆍ일전쟁이 발발하자 한인 독립단체의 통합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해 12월 김원봉은 난징에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 등 사회주의 계열 단체를 하나로 묶어 '조선민족전선연맹'(민전)을 꾸렸다. 민전은 무장부대의 조직과 대일항전의 참여를 목표로 제시했다. 민전은 1938년 7월 들어 중앙군사학교 성자분교 졸업생들이 한커우로 들어오자, 7일 중국 군사위원회에 조선의용군의 창설을 정식으로 건의했다.

군사위원장 장제스는 △무장부대를 규모상의 문제로 '軍'보다는 '隊' △군사위원회 정치부 관할에 둔다는 조건으로 승인했다. 1938년 10월2일 한ㆍ중 대표들은 4명 동수로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를 조직, 군의 명칭, 조직 인선, 편제, 활동경비 등을 결정했다.


조선의용대원은 포탄이 터지는 우한 시내로 투입됐다. 우한 보위전이었다. 국민당 고위인사들이 앞다퉈 우한을 빠져나갔지만, 대원들은 거꾸로 우한 중심가에서 반일 선전전을 벌였다. 그들은 사다리를 메고 다니며 담벽과 길바닥에 콜타르로 대적 선전구호를 쓰기 시작했다.

'일본 형제들이여, 착취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말라' '총구를 상관에게 돌려라' '병사들은 전선에서 피를 흘리고, 고위장성은 후방에서 향락을 누린다'

이 광경을 목격한 궈머루는 "의용대원들은 너댓명씩 한조가 돼 콜타르나 페인트로 거리나 벽에 대적 표어를 쓰고 다녔다. 모두 조선의용대뿐이었다. 중국인은 확실히 한 사람도 없었다. 우한 함락 직전 대적표어를 쓰고 있는 것은 조선의 벗들 뿐이었다"고 회고했다.(저서 '홍파곡' 1979년 발간)


조선의용대는 우한이 일본 수중에 넘어가자 그해 11월 구이린(桂林)으로 이동해 1940년 3월까지 1년5개월 여 동안 6개 대일전선 13곳을 누비며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부족한 전투장비에도 불구하고 오직 열혈의 충혼으로 일본군 460여명을 사살하고, 차량 121대를 파괴했다. 구이린마저 함락되자 의용대는 1940년 3월 충칭으로 이동했다.

조선의용대는 충칭 시절 10개월 동안 극심한 내부 갈등을 겪는다. 그리고 마침내 1941년 1월, 80여명의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뤄양(洛陽) 멍진 나루터에 집결한다. 가자~, 타이항 산으로.

중국 우한=이건상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