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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영남일보]“가위로 손톱 뽑는 지독한 고문 당해…그 친일형사 광복 후 경찰서장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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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항단연 작성일13-12-13 09:26 조회10,27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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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로 손톱 뽑는 지독한 고문 당해…
 
그 친일형사 광복 후 경찰서장 됐다”
 
“태극단 조직·와해 그리고 고문과 옥살이’ 독립지사 서상교 선생의 증언
 
설립 주도한 이상호 얼마나 맞았던지 기어서 나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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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지사 서상교 선생이 대구상업학교 재학시절 읽었던 책을 펴들고 있다. 서상교 선생의 서가엔 작은 태극기가 있다. 진정한 독립은 '남북이 평화통일이 돼 하나가 됐을 때"라고 했다.
1945년 8월16일 출옥 후 모습으로 온몸이 부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돼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요즘 이 단어를 헤프게 쓰는 경향이 있다. 사회 지도층이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거다. 하지만 희생과 헌신이 반드시 따라야만 그 값어치가 빛난다.

목민(木民) 서상교 지사(90).

달성서씨 현감공파로, 서침의 20세손이자 구한말 거유 임재 서찬규의 현손이다. 대구상업학교 5학년(당시 18세) 재학 시절 이상호, 김상길 등과 함께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태극단을 결성하다 발각돼 장기 7년, 단기 5년형을 언도받았다. 인천 형무소에 수감생활을 하던 중 광복을 맞아 석방됐다. 대구 최고의 명문가였던 그의 집안은 일제에 의해 모진 고초를 겪다가 가세가 몰락했다.

지난 6일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있는 서 지사의 집을 찾았다. 문 앞에 ‘애국지사의 집’이라는 작은 팻말이 있었다. 지난해 광복절 박원순 서울시장이 다녀간 뒤 구청 직원이 붙였다는데 특별히 드러내는 게 싫어 떼려고 했지만 떨어지지 않아 내버려두고 있다고 했다.

서 지사는 여의도에 있는 광복회본부로 출근해 옛 동지를 만나거나 산책 등으로 하루 일과를 보낸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우람한 체구에 외유내강의 풍모가 흐른다.


설립 주도한 이상호
얼마나 맞았던지
기어서 나오더라…

2003년 회식자리서
한 인사가‘밀고’실토

‘천왕께 안 부끄럽냐’
당시 판사가 묻길래
‘우리 천왕 아니다’해
1년 더 언도 받아

인천형무소 시절엔
운동장 풀 뜯어먹어
항상 배가 고팠다

석방 후 병원 가니
결핵에 심장판막증…
살아난 게 기적



■ 서상교 지사 일문일답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나.

“대구 중구 계산동 지금의 동산맨션 자리에 있던 99칸 한옥에서 태어났다. 옛 구암서원과 동산 일대가 달성서씨 집성촌이었다. 아버지(서정조)는 300년 이상 세거해 온 가문의 10대 종손으로 교남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남산 소학교에 다녔는데 작은 도련님이라고 불렸다. 몸종이 책가방을 대신 들어줄 만큼 부유했다. 성격이 불같아 ‘벼락땅방맹이’로 불렸다. 우리 집은 광복회 단원에 의해 사살된 친일부호 장승원에게 넘어갔다.”

-어떤 계기로 태극단을 조직하게 됐나.

“구한말 대구의 거유 서찬규가 고조부이고, 종조부이신 서건수는 3·8대구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파리장서에 서명한 독립지사다. 조국독립을 염원하는 가풍이 있었다. 소학교에 다닐 때 대구사범학교 출신 이상칠 선생이 조선어를 가르치다 눈물을 보이곤 했는데 나라를 빼앗겨 그런 줄 짐작했다. 대구상업학교에 들어가서 100점을 받아도 품행점수란 게 있어 일본학생보다 성적이 나을 수 없었다. 조선말을 못 하게 하고 창씨개명에다 제사 지낼 때 쓰는 유기까지 빼앗아갔다. 1학년 때 이태형이란 친구가 천장절(천왕 생일) 대구 시내에 일장기가 펄럭이는 걸 보고 태극기는 없고 일장기만 휘날린다고 일기장에 썼다가 고쳐 쓰라고 하는데도 말을 안 들어서 퇴학당했다. 조선독립을 위해 체력과 실력을 길러 자유와 평등, 평화를 쟁취하고자 태극단을 만들려고 했다.”

-결단식을 하고 난 이후 어떤 일을 했나.

“인도의 간디와 중국의 쑨원 선생이 쓴 글을 돌려보고 글라이더 연구라든지 군사훈련 같은 것도 하려고 했다. 어릴 때 체육을 좋아해 태극단을 체육단체로 위장하려 했다.”

-국외 망명을 생각하지는 않았나.

“만주에서 독립운동 하는 얘길 많이 들었다. 2학년 때 아버지가 형님과 나를 부르더니 나라 형편이 어려우니 만주로 가는 게 어떤지 물어보기도 했지만 실천하지 못했다.”

-태극단 동료는 누구였나. 그리고 현재 생존자는.

“이상호와 나, 그리고 김상길이 주동했다. 이상호는 광복 후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했고, 김상길은 해군사관 학교장 등을 역임하다 중장으로 예편했다. 현재 강남에 사는데 자주 본다. 나머지는 연락이 안 된다. 이준윤은 혹독한 고문 때문에 병보석으로 나갔지만 얼마 안 있어 죽었다.”

-어쩌다 발각됐나.

“1942년부터 준비를 했다. 이듬해인 5월9일 앞산 안일사 앞 약수터에서 결단식을 했다. 강령을 만들고 조직과 세포를 늘리려고 사람을 자주 접촉하다 일경이 냄새를 맡은 거다. 이상호가 처음 잡혀갔는데 자기 혼자 한 것이라고 끝까지 우기다 경찰이 이상호 집 천장에서 명단을 찾아내 26명이 체포됐다. 대구경찰서 2층에서 이상호를 만났는데 하도 맞아서 기어 나오더라. 짐작으로 조직원 중에 누가 밀고를 했지 싶었다.”

(그는 2003년 대구상고에서 열린 태극단독립운동기념탑 제막식을 끝내고 회식자리서 한 인사가 자기가 그랬다고 동지들에게 실토했다고 말했다)

-그를 어떻게 했나.

“과거의 일이니 이해하고 용서했다.”

-잡혀가서 어떤 고문을 당했나.

“몽둥이로 맞고 주리를 틀렸다. 공모자가 더 없냐고 고문을 했는데 망치로 손톱을 때리거나 철사 자르는 가위로 손톱을 뽑기도 했다.”

-주로 누가 고문을 했나.

“친일형사 김봉생이란 자가 고문을 했다. 지독한 놈이다. 그런 자가 나중에 왜관경찰서장, 포항 연일면장을 했다고 들었다. 그때 친일청산 제대로 했어야만 했다.”

-이상호는 어떤 인물인가.

“수재인 데다 의협심이 넘쳤다. 집은 대구 중구 현 삼성생명빌딩 부근에 살았다. 부친께서 대서소를 운영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재판을 받았는데 죄목이 무엇이었나.

“치안유지법을 어겼다고 했다. 검사가 장기 7년 단기 4년을 구형했는데, 판사가 나를 예쁘게 봤는지 1년 더 올렸다. 판사가 천왕폐하께 부끄럽지 않냐고 하기에 당신들의 천왕이지 어찌 우리 천왕이냐고 대들어서 그랬나 싶다.(웃음)”

-어느 형무소에 수감됐나.

“6명이 형을 받았다. 이상호와 김정진은 김천 형무소로, 나와 김상길, 이원현은 인천 형무소로 각각 갔다. 이원현은 내가 가입시켰는데 형무소에서 병을 얻어 45년 5월 단오 때 광복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매년 5월과 8월이 되면 죄책감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눈시울이 붉어짐)”

-독방을 썼나.

“아니다. 잡범하고 같이 썼다.”

-감옥생활은 어땠나.

“경찰서에 있을 때보단 나았는데 항상 배가 고팠다. 형무소 운동장에 자라는 풀까지 뜯어먹을 정도였으니깐. 거기서 성냥곽 만드는 일을 했다. 밀가루를 붙여서 만드는 데 밀가루를 몰래 숨겨 김상길한테 주다가 간수에게 발각돼 고막이 나갈 정도로 얻어 맞았다. 형무소에서 전신이 부었다. 광복 후 병원에 가서 알았는데 심장판막증에다 폐결핵까지 얻었다. 살아난 게 기적이지.”

-언제 석방됐나.

“광복절 다음 날 나왔다. 일본 간수가 그냥 내보낸다 하지 않고 가보석을 시킨다고 하더라. 나가서 소동을 일으키면 우리를 또 가두겠다고 엄포를 놓은 거지.”

-대구에는 언제 돌아왔나. 아버지는 뭐라고 하던가.

“석방되자 바로 내려왔다. 형님은 도쿄 유학생이었는데 학병으로 만주로 끌려가고, 나는 일본 사람에게 잡혀 형무소로 가서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니었다. 99칸 한옥에서 남산동 15칸으로, 다시 덕산동 초가로 이사를 했더라. 그래도 아버지께선 자식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야단치거나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달성군청에 취직했지만 하는 일이 조선사람 닦달하는 것밖에 없다고 투덜대다 사흘 만에 그만둔 분이다. 공초 오상순의 친구였는데, 51년에 병을 얻어 일찍 돌아가셨다.”

-6·25전쟁 때는 참전하지 않았나.

“안 한 게 아니라 못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허리디스크에다 폐결핵을 얻어 몸이 말이 아니었다. 좋은 공기를 마시려고 영선지에 가서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 특별한 약을 복용하지 않은 채 마늘과 쑥, 생콩을 매일 먹으면서 요양했다.”

-그 이후엔 어떻게 살았나.

“54년에 인천의 한 제철소에 다니다 공장이 문을 닫자 실업자가 됐다. 63년에 보훈대상자가 돼 정부에서 직장을 알선해 주겠다고 하더라. 촉탁으로 마흔이 넘어 은행에 들어가 정년을 마쳤다. 그 덕택에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았어.”

-독립은 됐지만 남북분단 60년이 넘었는데.

“남이고, 북이고 마음을 비우고 순수하게 평화 통일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서로 보듬고 도와야 한다. 남북은 한 핏줄 한 형제다. 형이 잘 살면 동생을 도와주고, 동생이 잘 살면 형의 몫까지 해야 한다. 그리고 공존, 공생, 공영해야 한다. 매끼 식사를 하기 전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천지신명께 기원하고 있다.”
<협찬> (주)지오씨엔아이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