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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영남일보]일제 총칼 앞에서도 學生은 살아있었다 - 잘 몰랐던 대구 항일학생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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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항단연 작성일13-12-13 09:37 조회9,62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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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총칼 앞에서도 學生은 살아있었다 - 잘 몰랐던 대구
 
항일학생운동
박진관기자 2013-12-13 07:5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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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고 교정에 있는 2·28학생운동기념탑과 조형물. 2016년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교문 근처에 항일학생운동과 6·25참전학도병기념비를 함께 건립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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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고 야구장 뒤편 학산남로에 태극단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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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 사범대 부설중·고가 위치한 달구벌대로 남쪽에 대구사범학교 항일학생의거 순절동지추모비가 있다.

고구려의 태학과 경당, 신라의 화랑도는 학교와 학생의 기원이다.

학생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일제강점기에도 그랬다. 3·1운동을 촉발시켰던 2·8독립선언은 동경유학생이 중심이 됐다. 3·1운동의 상징인 유관순도 학생이었다. 6·10만세운동(1926), 광주항일학생운동(1929) 역시 학생이 주역이었다.

대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3·8독립만세운동(1919) 때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경북고) 학생이 선두에 섰다. 3·1운동 후에도 민족차별에 항거해 등교를 거부하고 농성을 하는 동맹휴학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1923년 6월, 1925년 3월, 1926년 2월 대구고보에서 일본인 교원 배척 동맹휴학이 있었으며 1923년 1월, 1925년 11월 계성학교에서 동맹휴학을 했다.

6·10만세운동을 전후로 대구지역 항일학생운동은 사회주의운동과 결합해 좀 더 조직화되고 비밀결사의 형태를 띤다. 이는 전국적인 현상과 맥을 같이한다. 1927년 대구고보생들이 결성한 신우동맹은 혁우동맹, 적우동맹으로 변천했다. 1928년에는 일우당, 우리동맹, 서광회, 구화회 등의 결사체가 생겨났다.

계성·신명·대구고보
독립만세운동 앞장
日교원 배척 휴학도
대구사범·대구상업校
비밀결사체 조직해
몰래 군사훈련 실시
징병 끌려간 학생은
부대를 탈출하는 등
전시체제서도 ‘저항’

1931년 만주침략,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침략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황국신민화의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교육은 황국신민화정책 가운데 가장 중심정책이 됐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오노가 ‘통치 즉 교육, 교육 즉 통치’라고 했을 정도다.

허종 충남대 교수(사학과)는 “내선일체는 민족차별이라는 조선인의 불만해소와 전쟁동원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하고, 나아가 자발적인 동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이데올로기”라며 “이를 위해 궁성요배, 일장기 게양, 기미가요 제창 등 일본식 의례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40년 창씨개명을 강제했다”고 했다.

일제는 전시체제하 조선인 학생에게 군사교육과 노무동원을 시켰다. 1942년에는 조선인에 대해 징병제를 실시하고, 1943년에는 학도지원병제를 발표해 친일인사를 중심으로 선전을 강화하고 학병을 권유했다. 그럼에도 국내에서 다른 분야의 항일운동은 침체됐으나 학생운동은 끊이지 않았다. 서슬 퍼런 압제의 시절에도 학생은 살아있었다.

이 시기 대구에서는 유관순과 같은 학생열사가 줄지어 나타났다. 그들은 꽃봉오리도 피우지 못하고 일제의 총검 아래 스러졌다.

1929년 개교한 대구사범학교에선 문예부, 연구회, 백의단(白衣團) 등의 독서회와 비밀결사조직이 생겨나고, 이는 일본교사를 집단으로 구타한 ‘왜관사건’으로 표출됐다. 또 다혁당(茶革黨), 무우원(無憂園)같이 보다 적극적이고 전문적인 비밀결사체를 만들어 문맹퇴치를 주도하고, 몰래 군사훈련까지 실시했다.

1923년 개교한 대구상업학교(현 상원고) 학생들의 주도로 1942년에 조직한 태극단(太極團)은 민족해방과 조선독립을 지향한 결사체였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결사체와 마찬가지로 사전에 탄로가 나 지도자가 투옥돼 고문을 받다 옥사하는 등 모진 고초를 겪었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 징병에 끌려간 학생들은 부대를 탈출하는 등 전시체제에 저항했다. 대구24부대 탈출 사건이 그 예다.

일제강점기 학생은 선택받은 계층이었다. 하지만 특권과 안정된 미래를 버리고 항일의 선봉에 섰다. 하지만 3·1운동 이후 광주항일학생운동을 제외하고 학생독립운동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사학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허종 교수는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1930~40년대 독립운동을 암흑기로 표현하기도 했으나 전시체제하에서도 대구지역 학생운동은 면면이 이어졌다”며 “단지 잘 모르고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이번 호 위클리포유에서는 일제강점기 대구지역 항일학생운동을 다뤘다. 대구고보(경북고), 대구사범학교(경북대 사대부설중·고), 대구상업학교(상원고)를 찾아 취재했다. 또 태극단사건의 주역인 애국지사 서상교 선생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