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보도자료

[오마이뉴스]새해 첫날,나는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은 분에게 갑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항단연 작성일13-12-31 09:05 조회10,884회

본문

새해 첫날,


나는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은 분에게 갑니다

 
13.12.30 20:32l최종 업데이트 13.12.30 20:32l
 
기사 관련 사진
중국 상해 시절의 백범 일가. 가운데 어린이는 장남 인, 오른쪽이 부인 최준례 여사.
ⓒ 자료사진

백범 김구 선생을 아는 분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의 부인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두 아들을 둔 백범에게도 분명 부인이 있었습니다. 다만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사람들에게 잊혔을 뿐입니다. 2014년 갑오년 새해 첫날은 백범 부인의 90주기입니다. 이날을 맞아 몇 사람이 효창동 백범 묘소에서 조촐한 추도식을 열 예정입니다. 지난 1999년 4월 12일 부인을 이곳에 합장해서 이제 한 곳에 계십니다.

백범은 부인 최준례 여사를 황해도 신천에서 만났습니다. 당시 신천 사평동 예수교회의 우두머리인 양성칙이 그 교회 여학생 최준례를 소개하면서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백범은 31세, 최 여사는 그보다 13세 연하인 18세였습니다. 두 사람은 그해(1906년) 12월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장남 인(仁)이 태어난 것은 그로부터 12년 뒤인 1918년 11월이었습니다.

백범 부인의 죽음과 슬픈 가족사

그 사이에 세 딸이 태어났었습니다만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습니다. 5세 때 사망한 둘째 딸 화경은 백범이 소위 '안악사건'에 연루돼 풀려나기 직전에 죽었습니다. 화경은 죽기 전에 "나 죽었다고 감옥에 계신 아버님께 기별하지 마십시오. 아버님이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 상하시겠소"라고 해 나중에 감옥에서 풀려난 백범을 울렸다고 전합니다. 장남마저 젊은 나이에 요절했으니 백범 부부에게 자식복은 없는 셈이죠.

백범 일가 네 가족은 상해 시절 한때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최 여사가 둘째 신(信)을 해산하고 몸조리를 하던 중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크게 다쳤습니다. 최 여사는 시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해산한 며느리 산후조리를 위해 세숫물을 떠다놓는 것을 황송하게 여겨, 손수 물을 길러 가다가 계단에서 실족을 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 여사에게 폐렴까지 겹쳐 1년 넘게 고생하다가 상해 보륭의원에서 진찰을 받고 서양시설을 갖춘 홍구 폐병원에 격리,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별 차도가 없다가 1월 1일 마침내 숨을 거뒀습니다. 최 여사의 임종을 지켜본 사람은 상해임시정부의 안주인 노릇을 한 정정화 여사였습니다. 정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임종하기 전에 남편인 백범을 부르려고 하자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고 합니다.

최 여사는 남편이 올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홍구 폐병원은 프랑스 조계(租界) 밖에 있었고, 일경들이 백범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 여사의 연락을 받고 시어머니 곽 여사가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최 여사의 시신은 이미 영안실로 옮겨진 뒤였습니다. 차로 불과 10분 거리에 있었음에도 백범은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당시 백범은 임시정부에서 내무총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백범의 동지들이 의연금을 추렴해 최 여사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고 묘비까지 세웠습니다. 장례식은 1924년 1월 4일 오후 2시 프랑스 조계 내 숭산로 경찰서 뒤 공동묘지에서 기독교식으로 치러졌습니다. 최 여사의 그때 나이는 서른여섯, 백범과 혼인한 지 18년째였습니다. 이후 백범은 새장가를 들지 않고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살다가 1949년 안두희가 쏜 흉탄을 맞고 서거했습니다.

그런데 백범의 동지들이 세운 최 여사의 비문이 눈길을 끕니다. 그동안 봐온 일반 비문과 달리 조금 독특한 편입니다. '최준례 묻엄, 남편 김구 세움' 앞쪽에 최 여사의 생몰연월일을 적었는데요. 아라비아 숫자 대신 한글 자음을 이용해 표기했습니다. 이 비문은 당시 상해임시정부 의정원(현 국회) 의원으로 있던 한글학자 김두봉(金枓奉)이 쓴 것입니다.

"ㄹ ㄴ ㄴ ㄴ 해 ㄷ 달 ㅊ ㅈ 날 남
대 한 민 국 ㅂ 해 ㄱ 달 ㄱ 날 죽 음"

기사 관련 사진
최준례 여사 묘비와 함께 한 백범 일가. 뒷줄 왼쪽은 백범, 오른쪽은 모친 곽낙원 여사. 앞줄 왼쪽은 차남 신, 오른쪽은 장남 인.
ⓒ 자료사진

이 내용을 풀이하려면 자음 순서를 아라비아 숫자로 환원해서 이해하면 됩니다. 즉, 'ㄹ'은 아라비아 숫자로 하면 ㄱ-ㄴ-ㄷ에 이어 네 번째이니 '4'를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읽어보면, 최 여사의 출생일은 단기 4222년(서기 1889년) 3월 19일이며, 사망일은 '대한민국 6년', 즉 1924년 1월 1일인 셈입니다. 참고로 대한민국 원년(1년)은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입니다.

해방 후 귀국하기 전 상해에 들른 백범은 아내의 묘소를 찾았는데 이미 10년 전에 다른 곳으로 이장된 상태였습니다. 1948년 국내로 봉환된 최 여사의 유해는 한동안 서울 근교의 정릉, 금곡을 거쳐 지난 1999년 4월 12일 효창원 백범 묘소에 합장됐습니다. 헤어진 지 76년 만에 두 사람은 유골로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날 합장식에서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의 추도문 마지막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기사 관련 사진
최 여사를 이장해 효창원 백범 묘소에 합장하고 있는 모습. (1999. 4. 12)
ⓒ 정운현



"최준례(崔遵禮) 여사(女史), 76년 만에 부군(夫君) 옆에 오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맑은 두 영혼이 활짝 웃으며 반기실 것을 상상해 봅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모인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白凡金九先生紀念事業協會) 회원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오늘은 다른 때와 달리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앞으로는 5종남매(從男妹)의 손자손녀(孫子孫女)와 10여 종반 또는 재종반의 친외증손(親外曾孫)들이 철따라 우애롭게 찾아뵈올 것입니다. 기뻐하시옵소서."

장남 인의 사망... 죽어서도 함께 하지 못하는 백범 가족

백범 가족 가운데 최 여사만큼 안타까운 인물은 장남 인(仁)입니다. 인이 출생한 것은 셋째 딸(은경)이 사망한 그 이듬해인 1918년 11월이었습니다. 백범 나이 43세, 하나도 아니고 딸 셋을 차례로 잃은 백범 부부에게 인(仁)의 출생은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백범이 상해로 망명함에 따라 서로 떨어져 지내다가 1920년 아내가 상해로 건너와 가족들이 다시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인은 성장하면서 부친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인은 1937년 9월 상해에 파견돼 한국국민당 청년단 상해지구 기관지 <전고(戰鼓)>를 창간, 항일사상을 고취했습니다. 이듬해에는 장사에서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다시 상해로 파견돼 한국국민당 재건과 일제의 주요기관 폭파작전 및 요인 암살계획 등을 추진했습니다. 1939년 10월에는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한중 유대강화 및 첩보활동에 참가하였으며, 1940년에는 중경에서 <청년호성(靑年呼聲)>을 발행해 민족정신 함양에 이바지했습니다.

그러나 인은 해방 3개월 전인 1945년 3월 29일, 한창 일할 나이인 27세에 아내와 딸 하나를 남기고 이국땅 중경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인의 사인은 그의 모친 최 여사와 같은 폐병이었습니다. 다만 모친의 경우 늑막염이 발전하여 폐병이 된 것이지만, 인의 경우는 중경의 환경 탓이었습니다. 당시 중경에 거주하던 한국인 300~400명이 6~7년 거주하는 동안 순전히 폐병으로 사망한 사람만 70~80명에 달했습니다.

기사 관련 사진
중경 임시정부 시절 백범과 장남 인(뒷줄 왼쪽)의 모습.
ⓒ 자료사진

백범은 인의 죽음을 두고 "알고도 불가피하게 당한 일이라 좀처럼 잊기 어렵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전언에 따르면, 당시 인의 아내인 안미생(안중근 의사 조카)이 시아버지인 백범에게 "남편이 페니실린을 맞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백범은 "나의 노(老) 동지들에게도 해주지 못하는 것을 아들이라고 해서 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백범은 병중의 자식보다도 공(公)을 앞세운 것입니다.

장남 인의 요절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가 해방 후 살아서 고국에 돌아왔더라면 부친을 도와 큰일을 도모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의 유해는 지난 1999년 고국으로 봉환돼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할머니 곽낙원 여사와 함께 안장됐습니다. 정부는 그의 독립유공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추서했습니다. 백범 가족은 죽어서도 대전 현충원과 서울 효창원에 나뉘어져 있습니다.

험난한 효창원 국립묘지화

기사 관련 사진
3의사 묘역. 묘비가 없는 왼쪽 끝은 안중근 의사 가묘.
ⓒ 정운현

참여정부 시절부터 효창원 성역화 작업이 추진된 바 있습니다. 효창원에는 백범 선생을 비롯해 윤봉길-이봉창-백정기 3의사(義士)가 안장돼 있으며,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 가묘가 별도로 조성돼 있습니다. 또 임시정부 요인 세 분도 따로 모셔져 있습니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과 주석을 지낸 석오 이동녕 선생, 국무원 비서장을 지낸 동암 차이석 선생, 군무부장을 지낸 청사 조성환 선생 등이 그 분들입니다.

따라서 애국선열 7위를 모신 효창원은 현충원 못지 않은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효창원은 문화재보호법의 적용을 받는 '사적공원', 그리고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는 '근린공원''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적 차원의 예우를 받지 못하고 관리 또한 제대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서울 수유리 4·19묘지, 광주 5·18묘지도 모두 국립묘지로 지정돼 있습니다.

지난 7월 민주당 김광진 의원이 '효창원 국립묘지 승격'을 골자로 하는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제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습니다. 효창원 관할지인 용산구의회에서는 효창원의 국립묘지화를 반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했습니다. 효창원 주변의 일부 주민들은 "도심에 공동묘지가 웬말이냐"며 애국선열들을 욕되게 했습니다. 이는 '망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백범이 누구입니까? 일생을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입니다. 일제 때는 조국 광복을 위해 망명지에서 풍찬노숙했고, 해방 후에는 남북이 하나 된 완전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북행(北行)도 마다하지 않았던 분입니다. 그런 분이 누운 곳을 '공동묘지' 운운하는 그들은 대체 어느 나라 국민인가요? 이명박-박근혜 정권 들어 임시정부 알기를 동네 강아지만도 못하게 여기는 참으로 고약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민족사를 더럽힌 그들은 반드시 죄과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기사 관련 사진
백범 60주기를 맞아 한 무리의 어린이들이 선생님을 따라 백범 묘소 앞에 꿇어 엎드려 절을 올리고 있다. (2009. 6. 26)
ⓒ 정운현

* 알려드립니다.

새해 첫날, 최준례 여사 90주기를 맞아 '효창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효사모) 회원들과 함께 효창원 백범 묘소 앞에서 조촐한 추도모임을 가질 예정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누구나 1월 1일 오후 3시까지 백범 묘소 앞으로 오시면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갑오면 새해 첫날을 백범 묘소에서 맞는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