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강제노역 현장 고야기시마조선소
희생 알리는 표지판도 없어…우익 시비에 맞서 역사 지키는 시민도
(나가사키=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있지만, 강제 동원된 한반도 출신 노동자의 아픔은 거의 치유되지 못했다.
대표적인 강제동원 현장인 일본 규슈(九州) 나가사키(長崎). 최근 방문한 나카사키에서 관련 역사를 규명하고 책임을 묻는 작업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가사키에는 2차 대전 말기에 병참 기능이 집중됐고 한반도에서 끌려온 노동자가 특히 많았다.
나가사키 조선소, 고야기시마(香燒島) 조선소, 나가사키 병기 제작소, 다카시마 (高島)탄광,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탄광, 오시마(大島)탄광 등 나가사키 곳곳에 가혹한 노동 현장이 있었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조사해 인정한 일제 강점기 노무 동원 피해자(일본군 위안부·군인·군무원 제외)는 나가사키현만 3천419명, 일본 전체에 3만7천98명에 달한다.
이는 심사를 거쳐 정부가 피해자로 인정한 숫자이며 통계자료를 통해 파악된 동원 노동자의 수는 훨씬 많다.
최근 일본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면서 강제동원의 역사를 지운 곳으로 군함도의 사례가 두드러졌지만, 이 밖에도 강제 동원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 많다.
나가사키 항에서 배를 타고 나가면서 현재 미쓰비시 중공업이 운영하는 대표적인 강제 동원 현장 2곳을 볼 수 있었다.
다카자네 야스노리 (高實康稔) 일본 나가사키(長崎)대 명예교수가 6월 3일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의 독신자 숙소인 쇼와료(昭和寮) 마당에 있는 '원폭순난자방명비'에서 한반도 출신으로 추정되는 희생자의 이름을 가리키고 있다. 맨 오른쪽에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이승우'(李承宇)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고 '이병학'(李炳學)에서 성을 일본식으로 바꾼 것으로 추정되는 '李藤炳學'이라는 표기도 보인다.
먼저 오른쪽에서 대형 크레인과 함께 나가사키 조선소 본 공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 150명이 동원된 사실이 심사를 통해 확인됐지만, 조선인의 존재에 관해서는 공장 내 사료관에서도 언급하고 있지 않았다.
2015년 6월 4일 일본 나가사키(長崎)시 소재 미쓰비시(三菱)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대형 크루즈가 건조 중인 모습이 보인다.
조금 더 가면 왼쪽에 보이는 고야기시마 조선소(나가사키 조선소 고야기공장)는 피해가 확인된 조선인만 281명에 달한다.
그럼에도, 현지 여행업체 등은 '길이 300m에 달하는 초대형 유람선을 건조 중이다'며 흥미 위주의 내용이나 산업적 측면만을 부각하고 있었다.
나가사키대학 분쿄(文敎) 캠퍼스에는 일제 강점기 미쓰비시 나가사키 병기제작소 오하시(大橋)공장이 있었고 이곳 역시 조선인이 동원된 현장이다.
조선인 강제 노역 문제를 장기간 다뤄 온 다카자네 야스노리 (高實康稔) 일본 나가사키(長崎)대 명예교수와 함께 분쿄 캠퍼스 등을 방문해 흔적을 살펴봤다.
정문과 동문 인근에 있는 안내판, 담장에 덧붙은 '병기(兵器)'라고 새겨진 무릎높이의 표주(標柱)가 그곳에 병참 시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 강제 노동에 관한 설명은 없었다.
나가사키조선소에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 살던 마을다카자네 야스노리 (高實康稔) 일본 나가사키(長崎)대 명예교수가 '기바치료'(木鉢寮)가 있던 마을에서 기바치료가 있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미쓰비시 조선소에 투입된 근로자를 수용하는 합숙시설 가운데 한반도 출신 노동자가 기거했던 시설은 기바치료(木鉢寮) 등 7곳으로 알려졌다.
기바치료가 있던 지역은 현대식 일본 주택이 늘어선 조용한 마을이었고 여기서 강제 노동을 연상조차 하기 쉽지 않았다.
주택가 맞은 편에는 나가사키 조선소 쪽을 향하는 경사가 급한 계단길이 이어져 있었다.
다카자네 명예교수는 "지금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당시 기바치료에 살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 길을 따라 산을 넘어 조선소로 출근했을지도 모른다"고 언급했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의 독신자 숙소인 쇼와료(昭和寮) 마당의 '원폭순난자방명비'에는 한반도 출신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이름을 어렵게 찾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이승우'(李承宇)처럼 한국인으로 보이는 이름이 있었고 '이병학'(李炳學)에서 성을 일본식으로 바꾼 것으로 추정되는 '李藤炳學'이라는 표기도 확인됐다.
여기서 한반도 출신 노동자가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일하다 원폭으로 숨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으나 강제 노동의 역사를 명시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물론 의식 있는 일본인이나 일본인 단체가 오랜 시간 당국과 투쟁해 강제 동원을 표기한 곳도 있었다.
다카자네 야스노리(高實康稔) 일본 나가사키(長崎)대 명예교수가 일본 나가사키시 나가사키평화공원에 있는 원폭조선인희생자 추도비 옆에 모자를 벗고 서 있다.
전쟁 중 굴을 파고 그 안에서 어뢰 등을 만들던 장소인 미쓰비시병기 스미요시 (住吉)터널공장 입구의 안내판에는 '강제적으로 동원된 자가 있었으며 터널의 굴착 공사에서 가혹한 노동에 종사했다(중략) 거주자 대부분이 조선인 노동자였다'는 설명이 있다.
나가사키평화공원에 있는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의 뒷면에는 '강제연행 또는 징용으로 중노동에 종사하던 중 피폭으로 숨진 조선인과 그 가족을 위해서'라고 기재돼 있고 안내판에도 '일본에 강제연행돼 강제노동을 당한 조선인'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어렵게 공식화한 이런 표기에 대해 시비를 거는 이들도 적지 않다.
다카자네 명예교수에 따르면 표지판에서 '일본'의 영문 표기인 'Japan'에서 'n'이 흐려져 'Japa'처럼 보이는데 이를 문제 삼아 나가사키시를 상대로 추도비 철거를 주장하는 세력도 있다는 것이다.
자민당이 주축이 된 현 의회의 결의에 따라 조선인 추도비의 설치허가 갱신을 거부한 군마(群馬)현처럼 가해의 흔적을 지우려는 시도는 일본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어려운 형편에 사비를 털어 강제 동원의 역사를 밝히는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사가키 평화자료관'을 운영하는 다카자네 명예교수와 같은 시민이 이에 맞서 역사의 진실을 지키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