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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프레시안] 밀양 해천(垓川)에서 '의열단' 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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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01 13:07 조회6,94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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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시 내일동과 내이동 사이 해천 인근 의열기념관이 위치 해 있다. ⓒ밀양시 제공 






경남 밀양시 내일동과 내이동에는 ‘해천(垓川)’이 흐른다. ‘해천’은 조선시대 때부터 만들어진 지방 하천이다.  

이 '해천'에서 의열단이 탄생했고 일제 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한 걸출한 인물들이 다수 배출됐다. 

이름 그대로 항일독립운동사를 써내려간 역사적인 공간, 해천가의 '의열단 기념관'에는 여름 방학을 맞아 자녀와 손잡고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한일관계 반추하는 의열기념관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

한일 관계가 심상치않게 돌아가는 작금-. 이보다 더 좋은 '자녀교육의 현장'이 또 있을까.

이름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자그마한 하천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주도한 역사적 인물들을 탄생시켰다. 무장 독립운동의 상징인 의열(義烈) 투사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영화 '암살'과 MBC 드라마 '이몽'이 깨운 ‘의열단장 김원봉’도 여기서 태어났다. 

 

해천은 '해자천'의 줄인 말 .. 조선 성종때 왜구 노략질 막기위해 조성


조성 성종 10년, 왜구들의 노략질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조정은 이를 막기위해 밀양읍성을 쌓고 이곳에 수로를 조성하였다. 바로 '해자(垓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하천이나 못)이다. 해천은 '해자천'의 줄임말이다. 이 때부터 일본을 극복하려는 기운이 이곳에서 싹텄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일까? 밀양 해천은 항일운동과 독립운동가 배출의 근간이 되었다. 일본의 경제적 도발이 한창인 요즘 부모가 자식의 손을 잡고 일제의 침략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교육장이 되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  


해천 양쪽으로 항일테마거리 조성 .. 김원봉 단장 생가 터도

 

해천의 길이는 약 600여m쯤 된다. 해천 양쪽으로 항일운동 테마거리가 조성돼 있다. 항일운동테마거리 입구-. 밀양지역 독립운동가 79명의 위패가 방문객을 무언으로 맞는다. 오로지 조국광복만을 염원하면서 청춘과 목숨과 재물을 다 바친 분들에겐 조국의 오늘이 꼭 100년 전의 그때와도 같을 것이다.  


해천 중심의 의열기념관은 "나 밀양사람이요" 김원봉 단장의 생가 터에 세워져 있다. 바로 옆에는 김 단장의 절친 윤세주(1900~1942) 열사의 생가가 있다. 윤세주 열사는 밀양 3·13 만세운동을 이끈 주역이다. 그의 집 앞에는 손수 지은 항일가 '최후의 결전'이라는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황상규, 김대지, 권잠술, 홍재문, 윤치형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어린 시절을 이 해천에서 보냈다. 

1898년 이곳에서 태어난 약산 김원봉은 1919년 만주 길림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22세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립하고 단장이 되었다. 후에 조선민족혁명당(1935년) 총서기와 조선의용대(1938년) 총대장으로 항일무장독립투쟁에 앞장섰다. 그의 아내 또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투사 박차정 열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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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시 내이동 해천 인근 건물 벽면에 밀양 독립운동가의 명패가 적혀 있다. ⓒ밀양시 제공 



 




김원봉 서훈 논란에 누가 말할 자격 있나.. 그가 서훈 달라했나 


그에 대한 논란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겐 괜한 '논란꺼리'일 뿐이다.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그와 그의 동지들에겐 한갖 '가소로운 논쟁'일지도 모른다. 오늘을 사는 그 누가 김원봉에게 '서훈'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그가 서훈을 달라고 한 적이 있는가. 그 누가 그에게 '북으로 갔으니 빨갱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의열기념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그들을 기리는 곳  

 

의열(義烈)이란 '의로운 일을 맹렬히 행한다'는 뜻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싸운 장렬한 행동과 그 가치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 의열단은 친일파들이 일제에 부역하고 그 열매를 삼키고 있었을 때, 피와 죽음으로 그들을 응징하였으며 일제의 침략행위를 세계 만방에 알렸다. 중국 장개석 총통이 의열단 활동에 감명을 받으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많은 도움을 준 사실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의열단뿐 아니라 신간회, 대한독립군 등 많은 항일독립운동단체가 있었고 모두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그래서 밀양의 의열기념관은 의열단은 물론 의열투사 모두를 기리는 공간으로 우뚝 서 있다. 

1919년 의열단을 창립한 길림의 농가 반씨주택 눈길  

 

해천은 '밀양이 의열투쟁의 본향이 될 수밖에 없었던 지역적 특성과 원동력'을 함께 알려준다. 의열기념관에서는 안중근, 윤봉길 의사 등의 의열투쟁과 김원봉 장군의 연설장면 등을 담은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반씨주택도 눈길을 끈다. 반씨주택은 1919년 의열단을 창립한 길림의 농가다. 반씨 주택을 거쳐 안으로 들어가면 의열단 창립단원 10명(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김상윤, 서상락, 신철휴, 윤세주, 이성우, 이종암, 한봉근)과 초창기 고문인 황상규, 김대지 선생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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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때 밀양 의열단원들이 사용 하였던 권총이 의열기념관에 전시 되어 있다. ⓒ밀양시 제공 







밀양시, 정치권 논란 불구 "의열기념공원으로 조성할 것"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의열단 창단 100주년이다. 의열단 창단일은 오는 11월 10일이다. 시는 10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 중이다. 

의열기념관과 밀양아리랑아트센터 등에서 기념식과 김원봉과 의열단을 주제로 한 창작 뮤지컬 공연 등이 준비되고 있다. 많은 정치권의 논란에도 불구, 밀양시는 이곳을 독립운동체험관으로 만들어 나갈 계획이다. 의열기념관 주변을 의열기념공원으로 조성하고 윤세주 생가도 복원한다. 밀양을 항일애국역사의 상징으로 승화시킨다는 꿈을 꾸고 있다.

 

lchoulwo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