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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경기일보]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친일파 기념물 보존해야 하나, 철거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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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9 09:53 조회9,2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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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행위 역사적 증거물...과거의 교훈 되돌아보는 거울로

■ 해방 후 사라진 ‘팔굉일우비’… 2008년 용인에서 발견
2008년 8월 경기도 용인에 있는 양지초등학교 앞 도로 공사에서 땅속에 묻혀 있는
비석 2개가 발견됐다. 이 비석은 친일파 송병준과 그 아들 송종헌의 공덕비였다.
대표적인 친일파는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은 인물들인데 이 두 사람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송병준은 1907년 농상공부 대신으로 있으면서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킬 때, 그리고 정미칠조약을 체결할 때 앞장섰기에 ‘정미 칠적’
으로 지탄받은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송병준은 일제로부터 그의 친일 공적을 인정
받아 1910년 자작이 됐고, 1920년 백작으로 승작 됐다. 송종헌은 아버지 송병준이
사망하자 그 작위를 물려받아 백작이 된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양지초등학교는 친일 거두 송병준과 송종헌의 기념비가 발견되자 이 소식을 용인
문화원에 전했다. 2008년 9월6일 용인문화원 김장환 사무국장은 역사교사인
김태근과 흥사단 회원 등 이 비석에 관심을 가질만한 이들과 함께 학교로 달려갔다.
현장에 도착하니 비석은 학교 창고에 보관 중이었다. 이들 일행은 창고 문을 여는
동안 학교 정문 옆에 있는 넓적한 돌덩어리에 걸터앉아 기다렸다. 당시 이 돌은
목재 벤치와 나란히 놓여 있어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별생각 없이 휴식을 취하는
석재 벤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앉아 있는 넓적한 돌덩어리에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돌의 상단에는 큰 글씨로 ‘팔굉일우(八紘一 宇)’ 글자가, 그 옆에
작은 글씨로 ‘삼위 백작 야전종헌 근서(三位 伯爵 野田鍾憲 謹書)’란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었다. 돌의 측면에는 ‘개교 30년 기념 소화 16년 9월1일 동창회 후원회
증정(開校 30年 記念 昭和 16年 9月1日 同窓會 後援會 贈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야전종헌은 송종한의 창씨명이다. 이 비는 소화 16년에 세워졌으니 1941년 송종헌이
쓰고 당시 양지초등학교 동창회가 후원해 건립한 팔굉일우비였다. 현장의 용인문화원
일행은 팔굉일우비를 발견하고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해방 후 한국 땅에서 사라진
팔굉일우 비석이 처음 발견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팔굉일우비’ 일제의 조선 침략착취를 증거하는 역사적 기념물

‘팔굉일우’는 1940년 일본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시정 연설에서 “황국(일본 제국)의
국시는 팔굉을 일우하는 국가의 정신에 근거한다”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이 시기는
일제가 동아시아 전역을 침략한데 이어 태평양으로 침략의 마수를 확대할 때이다.
‘팔굉일우’는 ‘전 세계가 하나의 집’이란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가 그 들의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건 제국주의 논리이자 구호였다. 일제는 제국주의 침략을 미화하고
 홍보하기 위해 1940년 일본은 물론 조선 전역에 팔굉일우비를 건립했다. 팔굉일우비
는 일제의 조선 침략과 지배 그리고 조선인 착취를 증언하는 역사적 기념물이다.

해방이 되자 한국인들은 팔굉일우비를 그대로 둘 수 없었을 것이다. 땅에 묻거나,
비석을 옮기고 석재를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비석 중 일부는 파손해서 폐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팔굉일우비는 우리의 시야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팔굉일우비가 역사에 다시 등장한 것은 근래의 일이다. 2011년 전라남도 목포여자
중학교에서 운동장 공사 중 팔굉일우비가 발견됐다. 이 비는 현재 목포근대역사관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2017년에는 전라남도 해남 마산초등학교에서 고인돌 상판으로
 사용되고 있던 팔굉일우비를 학교 행정 직원이 점심 시간에 산책 중 우연히 발견했다.
용인과 해남의 비석은 그 긴 시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심코 보고 넘긴 것을
‘매의 눈’을 가진 이들이 발견한 것이다. 용인의 팔굉일우비는 해방 후 최초로 발견된
팔굉일우비이기에 역사적 의미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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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초등학교에서 발견된 ‘팔굉일우비’와 송병준과 송종헌의 공적비는 발견 당시
용인문화원이 양지초등학교로부터 인수받아 현재까지 보관하고 있다. 이 비석은
민족문제연구소에 두 차례 대여돼 시민에게 공개됐고, 2019년 용인문화원이 주최한
 ‘용인시민 소장 문화재전 및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전’에 친일 자료로 공개돼
관람객들로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김장환 용인문화원 사무국장은 이 3개의 친일
기념물을 용인시가 건립 추진 중인 용인독립기념관이 완공되면 그곳에 넘겨 전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팔굉일우비는 국내에서 3개밖에 없는 유물이고, 송병준과 송종헌은 대표적인 친일파
이기에 이 비석들은 역사적 가치가 높다. 독립기념관 개관 이전이라 하더라도 이를
전시, 교육 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용인문화원과 용인시민, 그리고 용인시의 과제로
남아 있다.

경기도, 친일 및 일제 식민지 지배 관련 기념물 산재

경기도에는 친일파와 일제 식민지 지배와 관련된 기념물이 다수 남아 있다. 2020년
민족문제연구소 조사보고서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연구 용역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문헌과 현장 조사를 통해 확인된 일제 식민지 시대 및 친일 관련 기념물은
188개이다. 현장 조사 결과 현존하는 것이 139개이고, 나머지는 멸실됐거나 현존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 조사는 경기도 전 지역에 대한 전수
조사가 아니기에 추후 세밀한 조사를 하면 더 늘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념물은 친일파의 기념비와 송덕비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머지는 수룡수리조합
기념비와 같은 식민지 지배 기구를 기념하는 비, 수원 권업모범장 잠업시험소 여자
잠업강습소를 나타내는 표지석 그리고 일본인 동상 등이다.

이 중 주목해야 할 것이 친일파의 기념물이다. 대표적인 친일파의 기념물로는 2008년
 용인에서 발견된 ‘백작 송종헌 영세기념비’이 있다. 군수를 지낸 친일파의 기념비로는
 남한산성 남문 비석 군에 남아 있는 ‘강원달 광주군수 영세불망비’, 안성군 대덕면
사무소 앞에 있는 ‘최태현 안성군수 청덕애민송덕비’와 ‘서상준 안성군수 청덕불망비’,
안성군 양성면 양성향교 앞에 있는 ‘나호 안성군수 모성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의 명칭에는 ‘영세’, ‘불망’, ‘기념’과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기념비를
세운 이들은 비석 주인공의 공을 ‘영원히’, ‘잊지 말고’, ‘기념하자’는 뜻에서 세웠을
것이다. 또 비석의 주인공은 자신의 공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기념’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이제 이 비석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영원히 친일파의 친일 행위를
기억하는 역사적 증거물이 됐다. 돌에 새겼으니 바람과 비에 시달린다 해도 오랜
기간 사라지지 않고 친일파의 행위를 증언해 주는 역사적 기념물이 될 것이다.

친일 기념물 보존… 식민지 체제 청산 증거물로 삼아야

일제 식민지 시대가 남긴 기념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철거를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일제 식민지가 남긴 유형의 기념물은 보존해야 한다.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되는
역사, 그래서 우리 기억 속에서 빼버리고 싶은 역사이지만, 그 흔적을 지운다고 그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민족의 자랑스러운 유산만이 역사적 기념물이 아니다. 민족의 아픈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다. 친일파의 기념물, 일제 식민지 시대를 상징하는 기념물은 우리가 역사로
터 교훈을 얻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증거물이다. 이들 기념물을 역사적 기념물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안내판을 설치해 친일파의 행적을 기록하고 이들 기념물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관람객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 체제를 청산
하고 극복하는 역사적 상징물로 활용해야 한다.

강진갑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前 경기대 교수

출처 : 경기일보(http://www.kyeong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