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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독립에 전 재산 기부하고도... 두 형제에 가려진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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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8-05 11:08 조회8,45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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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潁石) 이석영(李石榮 1855-1934)은 우당(友堂) 이회영

(李會榮) 선생과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선생의 둘째 형님이다.

이석영은 모두 6형제인데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모든 가산을

처분하 6형제 전 가족 50여 명과 함께 1910년 12월 빼앗긴 나라를

찾고자 만주로 망명했다.

이들 형제는 조선조 명신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11대 세손이다.

백사 이후 영석 대까지 9명을 영의정을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라

하여 삼한갑족이라고 부른다.
이석영은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양자로 들어가,

증광시(增廣에 급제하여 비서원승(秘書院丞), 소경(少卿) 등을 지냈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양부 이유원이 서거하자, 만석이 넘는 재산을 상속받다 모두 처분

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나라가 망했는데 재산이 무슨소용이

있느냐며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이다.

사회 지도층으로서 솔선수범하여 책임을 다하는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평가할 수

있다.이석영의 공적은 아직도 일반 국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아우인 이회영과 이시영의 활동에 가려진 면도 있을 것이다.

국가보훈처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하였고. 이번

8월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선생의 업적을 재평가할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석영은 서울 출신이지만, 양부 이유원의 근거지는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이다. 그의 토지는 지금의 양주시와 남양주시 등

일원에 있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이 자랑스럽게 기려야 할 인물임

에도, 지금 이 지역에서 이석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남양주

시에서는 이석영 선생의 자료를 발굴하여, 지난 5월에는 금곡 홍유능

앞 공지를 정비하여 '이석영 광장'으로 명명하고, 8월 말에는 지하에

독립운동 체험관을 개관할 예정이며, 9월에는 화도읍에 '이석영

미디어 도서관'을 개관한다.

이석영은 신흥무관학교를 개교할 때 교주로 추대되었다.

이은숙의 회고록 <서간도시종기>에 따르면 "만주인들이 영석 선생을

지극히 존경하여 만주왕으로 불렀다" 고 회고했다. 72세에는 천진으로

이거하였다가 1927년 5월부터 상해에서 살았다. 아우 이회영이 순국한

후 1933년에 신병 치료차 일시 귀국했다가 주변의 만류에도 금강산

관광을 핑계 삼아 일제의 눈을 피하여 상해로 다시 망명했다.
  
상해에서 발행되던 <한민(韓民)> 1936년 5월 25일 자는 '서간도 초기

이주와 신흥학교 회상기'라는 글 중에서 "이석영이 수많은 재산을 신흥

무관학교 운영에 모두 쏟아붓고 나중에는 지극히 곤란하게 생활하면

도 일호의 원성이나 후회가 없고 태연하여 장자(長子)의 풍이 있었다"

썼다. 1934년 서거했을 때, 동아일보는 그해 2월 28일 자에 "상해

객창(客窓)에서 영면, 유량 30년, 유해도 이역에 묻혀"라고 보도했다.

이석영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처분한 재산 규모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양부 이유원은 "양주에서 서울로

오는데 80리 길을 남의 땅을 밟지 않을 만큼 광대한 땅"을 가지고 있

었다. 이유원이 당시 서울 경기 일원의 5대 부자의 한사람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석영이 망명하던 1910년에 민족계 은행 3개(천일은행, 한성은행,

한일은행)의 납입자본금이 32만5천 원이었다. 이석영 일가가 처분한

재산이 40만 원이니, 최소한 은행 3개를 설립하고도 남는 금액이었다.

1969년 월간 신동아에서는 600억 원으로 추산했다. 왕현종의 <우당

이회영 일가 독립운동 재산 조사사업>(2011)에 의하면 이석영 일가가

처분한 토지는 대부분이 이석영의 소유였다. 6형제가 처분한 토지가

726필지에 266만8335평이며, 2015년 공시지가로 2조 원이 넘는다고

한다.

이석영 6형제는 이 자금으로 1911년 경학사를 설립하여 망명한 동포

들의 현지 정착을 지원했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10년 동안 3500여

명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주도 세력이었으며, 1920~1930년대 중국 무장

조직의 주역이었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을 창설할

때, 지청천 사령관, 이범석 참모장 겸 2지대장, 김원봉 1지대장과

김학규 3지대장 등 고위 지휘관이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의열 투쟁의 중심인 의열단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의열 조직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광복 후 46년인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

하였다. 아들 이규준도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이석영의

엄청난 재산이 대한민국의 초석이 되었음에도, 그에 대한 대접이

소홀히 했다고 사실을 반성해야 한다.

특히 올해는 독립전쟁 전승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 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 참여했던 독립군 간부들이 대다수 신흥무관학교

출신임을 고려할 때, 신흥무관학교의 교주로서 전 재산을 투자하여

10년 동안 독립군 지도자 3500여 명을 양성하는데 기여한 이석영 선생의

 공훈과 업적을 다시 평가해야 할 것이다.


◎ 오마이뉴스 황원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