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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시사주간] 윤봉길 의사가 걸은 '한 걸음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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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8-05 11:19 조회8,3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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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주간=임동현 기자]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효창공원. 이 곳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선열들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맡아 자주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백범 김구

선생의 묘가 있으며 임시정부 의정원 초대의장과 주석을 맡았던 석오 이동녕

선생, 군무부장을 역임한 청사 조성환 선생, 비서장을 맡았던 동암 차리석 선생

묘가 한 자리에 있다.

그리고 '삼의사'. 1932년 1월 일왕 히로히토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 의사

같은 해 4월 상해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에서 전승축하식 단상에 폭탄을 던져

일본 군 장성들을 살상한 윤봉길 의사, 1933년 3월 아리요시 주중일본공사를

폭살하려는 '육삼정 의거'를 모의했던 백정기 의사가 모셔져 있으며 하얼빈에서

아직도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기다리고 있는 안 의사의 가묘가 삼의사

묘역에 함께 모셔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이들을 잘 알지 못한다. 엄밀히 말하면 학교에서 배운 국사

수업에서도 이들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배운 기억이 없다. '도시락 폭탄', '백범

일지'등 단편적인 부분들은 기억하지만 이들이 독립을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노력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부분적인 기억만으로 이들의 얼을 이을 수는 없는 것이다.

선열들을 기억하려는 기념사업이 지속되고 기념사업회가 운영되고 있지만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게 현실이며 유족들이 사업에 배재되는 경우도 다반

로 벌어지고 있다.


국가가 예우를 한다고 하지만 '끝까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직은 의문이다.

광복 75주년, 그리고 75주년 광복절을 앞둔 2020년 8월에 본지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선열들의 노력을 다시 상기해보고자 한다.


지금 이 순간, 본지가 이 선열들을 다시 부른 이유는 이들의 업적을 잊지 말자는,

이들이 온몸을 바쳐 싸워 온 생애를 잊지 말자는 의미도 있지만 이들의 노력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어떻게 살려야할 지, 그리고 이를 통해 내우외환으로 몸살을

앓는 현재의 대한민국을 어떻게 치료해 나갈 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와 함께 그들의 노력을 지금 우리는 어떻게 보고 있으며 우리가 부족한 부분은

무엇이 있는지를 반성해보는 계기를 만들어보고자 한다.

"짧은 세월에 보통 사람, 우리 세대가 할 수 없는 큰 일을 한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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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에서는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일본상해파견군의 전승을 축하하는 축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오전11시 30분, 토모노 민단서기장의 개회사와 가와바다 민단장,
무라이 총영사의 축사에 이어 참석자들이 해군군악대의 반주에 맞춰 기미가요를
부르고 있었다.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하고 기미가요 제창이 끝나는 순간, 마이크에서 '삐익'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신호였을까?

경비 병력을 헤치고 돌진한 한 청년이 단상에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시라카와 대장, 우에다 사단장 등 일본군 장성들이 앉아있는 곳에 정확히
명중됐고 요란한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졌다.

참석한 군 장성들은 고통 끝에 숨을 거두었고 실명을 하거나 다리를 절단한 장성
나왔다.

"짧은 세월에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신 분이 바로 윤봉길 의사입니다.

20대의 나이에 우리 세대가 하지 못한 의거를 이루고 의롭게 돌아가신 분입니다.

이분을 우리는 독립운동가로 알고 있지만 농촌 부흥을 이끈 농촌운동가였고 주옥
한시를 300여편 남겼는데 구절 하나하나가 명문장입니다.

시인이고 문학가이고 나라를 구하신 독립운동가가 윤봉길 의사입니다".

윤봉길기념사업회에서 활동하면서 윤봉길 의사 사적비 건립 등에 참여하는 등
지금도 윤봉길 의사의 정신을 이어가는 일을 하고 있는 이해상 선생의 말이다.

실제로 윤 의사는 15세부터 시회가 있을 때면 나이든 선비들을 제치고 장원을
도맡을 정도로 한시에 뛰어났으며 독학으로 역사와 신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
문맹을 타파하위해 노력했다.

'목계구매조합'을 결성해 조직 농민협동과 자활운동을 했고 농민에게 야학을
통해 한글을 가르치고 정신개혁운동을 하기 위한 교재인 <농민독본>을 저술하
기도 했다.

그렇게 농촌계몽운동에 매진하던 윤 의사는 1930년 23세의 나이에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사나이 집을 나서 큰 뜻을 이루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
오지 않겠다)'이라는 글을 남기고 홀로 상해로 떠난다.

그리고 1931년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거사에 참여할 준비를
하게 된다.

거사 직전 윤 의사는 아직 어린 아이였던 아들 모순과 담에게 이런 유촉시를
남긴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후략)' 윤 의사가 거사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대범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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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의 거사는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부각시킨 점과 상해사변 전승으로
사기가 올랐던 일제에 큰 충격을 줬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있지만 중국인들의 항일
의지를 고조시키면서 한중 공동 항일전선이 구축되고 중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일제는 이 의거로 중국 본토 확전을 단념하고 그해 5월초 중국과 정전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윤 의사의 의거가 평화의 시작이 된 것이다.

"윤 의사의 한 걸음 한 걸음은 다 나라를 위한 길이었습니다. 자기의 영달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농민 교육과 계몽,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길을 걸어간 분입니다.

처자를 두고 혈혈단신 나선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세계화를 이루고 세계평화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결정을 했습니다.

이런 분을 우리는 선각자라고 합니다. 파벌이나 정파를 떠나 이런 부분을 배워야할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윤 의사의 생각과 같았습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라를
위해서 일을 했습니다.

선열들이 이룩한 업적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고 그 정신을 국민들이
받들 수 있도록 앞에서 이끌어나가는 자리에 유족들이 계셔야합니다".(이해상 선생)

이런 부분에서 우리가 지켜봐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윤 의사에 앞서 1932년 1월
의거를 계획한 이봉창 의사다.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일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던 이봉창
의사. 하지만 윤봉길 의사와 달리 이봉창 의사에 대한 기록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 이봉창 의사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전할 예정이다.

ldh@economicp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