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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광주드림] 육삼정 의거로 옥사한 백정기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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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7-24 11:00 조회8,29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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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기(白貞基)는 1896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은 정읍에서 보냈고
청년이 되어 서울로 상경했다.

1919년 3월1일 3·1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고향 정읍으로
내려가서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서울과 인천에서 일본 군사시설에 대한 공격 활동에 참여했다.

1921년 일제 경찰에 붙들렸지만 가짜 이름과 주소를 둘러대고 방면되자 베이징으로
망명했다.

일본에 침투해 야마나시현 하야카와 수력발전소 공사장을 파괴하려다 실패하고 베이징
으로 돌아갔다.

또다시 일본 메이지 텐노를 암살하려고 도쿄에 갔으나 간토 대지진과 간토 대학살로
실패했다.

백정기는 1924년 상하이에서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고 민족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아나키스트의 입장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아나키즘은 모든 종류의 억압과 지배를 반대하는 ‘무정부주의’를 말하며 백정기를 비롯해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이회영,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한 신채호, 의열단 단장 김원봉,
22년 2개월 동안 구속된 박열 등이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독립 운동가이다.

흑색공포단 조직하여 활동

1932년 상하이 백정기 집에서 자유혁명자연맹을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으로 개칭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흑색공포단은 일본 제국의 요인을 암살하고 일제 기관을 파괴하며 친일분자를 살해하는
무력 투쟁 조직이다.

난징에서 친일 괴뢰정권을 세운 국민당 왕징웨이(汪精衛) 저격, 일본 영사관에 폭탄투척,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등을 하였다.

일본 경찰과 헌병도 무서워하지 않아 일제는 ‘검은 옷을 입은 공포의 대상’으로 불렀다.

1933년 3월17일 주중(駐中)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중국 국민당 유력자를
상하이 홍커우의 고급요정 육삼정(六三亭)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 등은 연회장을 습격하여 일본 공사를 사살하려고 계획했으나
밀정의 고발로 거사 직전에 현장에서 검거됐다.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나가사키 법원에서 백정기 의사와 원심창 의사는 무기징역을,
이강훈 의사는 징역 15년 형을 언도받았다.

백정기 의사는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34년 6월5일 39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원심창 의사와 이강훈 의사는 해방이 되자 석방됐다.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 의사는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육삼정 의거로 피체되어 옥사

1946년 ‘3의사 국민장 봉장 위원회’를 발족하고 일본으로부터 유해를 봉안하여 국민장을
실시하고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효창공원에는 백범 김구를 비롯해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의사와 이동녕, 조성환,
차리석 등 임정요인 등 총 7분의 의사가 묻혀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의 유골조차 귀국하지 못하고 가묘로
남아 있다.

백범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실천적 비밀조직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등을 처단했고, 이봉창
의사는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 임시정부 군무부장 조성환, 임시정부 비서장 차리석 등은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백정기 의사는 구마모토 형무소에서 운명하기 하루 전에 원심창 의사와 이강훈 의사에게
“나는 몇 달을 더 못살겠다. ~ 조국의 자주 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
주기 바라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부친을 잃고 어린 시절을 살았던 정읍에는 백정기의사고택지와 백정기의사기념관이 있다.

서일환(역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