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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시사IN] “일제 앞잡이가 영웅 되면 대한민국이 뭐가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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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7-09 14:01 조회7,27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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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죽더라도 잘못된 군 역사 하나는 바로잡겠다고 각오했다.

독립군과 조선인을 죽이고, 전공을 과장해 스스로 영웅이 된

백선엽이 국립현충원에 묻힌다면 역사의 후환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박경석 장군(88·예비역 육군 준장)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야전에서 두루 거친 노병이다.


한국전에서는 화랑무공훈장을, 베트남전에서는 최고 무공 수훈인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는 이른바 ‘육사 생도 2기’ 출신이다. 1950년 6월1일 첫 4년제 정규 육군사관학교 생도로

입교했다가 20여 일 만에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임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전장에

투입됐다.


박경석과 함께 포천 전투에 참가한 동기생 330명 중 86명이 초기에 전사했다.


17세의 초급장교였던 박경석도 전투 중에 수류탄 파편에 맞아 몸의 왼편을 크게 다친 와중에

인민군 포로가 됐다.


그가 포로가 된 뒤 부대에서는 전사자로 처리한 다음 서울 동작동 국군묘지(국립현충원)에

가묘를 설치했다. 집에서는 장례식까지 치렀다.


지금도 동작동 국립현충원 15-2묘역에는 ‘고 육군 소위 박경석의 묘’가 그대로 남아 있다

(박경석은 지금도 우울할 때면 자신의 묘지를 찾아가 상한 마음을 달랜다고 한다).


인민군 10사단에 포로로 잡힌 박경석은 심문을 받다가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석방됐다.


이후 원대 복귀한 그는 1950년 겨울 평창 전투에 참가해 큰 전공을 세우고 무공훈장을 받았다.


베트남전에서는 맹호부대 초대 ‘재구대대장(강재구 소령 추모 대대)’을 맡아 전공을 세웠다.


귀국해서 군 생활을 휴전선 등 야전에서만 보내던 그는 박정희 정권 아래 독버섯처럼 자라던

군내 정치 사조직에 맞서 입바른 말을 곧잘 했다.


이 일로 일찌감치 정치군인들 눈 밖에 난 박경석은 1975년 늦깎이 장군으로 진급한 뒤 1980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을 끝으로 군을 떠났다.


당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 신군부가 그에게 진압 부대에 무공훈장을

수여하도록 심사를 맡아달라고 강요했다.


그는 단호히 거부하고 스스로 군복을 벗었다.


야전 군인 박경석은 초급장교 시절부터 ‘숨은 문인’이라는 특이한 이력도 갖고 있다.


그는 육군 대위 때 필명 ‘한사랑(韓史郞)’으로 등단해 틈틈이 시와 소설을 썼다.


산전수전 다 겪은 야전 경험을 토대로 지금까지 총 83권의 저서를 냈다.


이 가운데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 시기 명장으로 꼽히는 김홍일과 채명신 등 원로 장성

15명에 대한 평전과 회고록도 포함돼 있다.


현재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등 전국의 군 시설 11곳에는 박경석의 시비가 들어서 있다.

 

군 예편 이후 문인이자 군사평론가, 군사연구자의 길로 들어선 박경석은 왜곡되고 굴절된

한국 군사(軍史)를 바로잡는 데 일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한다. 6·25전쟁 과정의 ‘가짜 영웅’

실태를 조사하고,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국군 창설 초기 친일파와 독립군 장교를 연구했다.


특히 6·25전쟁 영웅으로 알려진 백선엽이 일본군 간도 특설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는 데

앞장서고 일왕에게 충성을 다짐했던 숨은 행적을 추적하는 데 오랜 기간 매달렸다.


더 나아가 한국전쟁 과정에서 ‘육탄 10용사’ ‘육탄 5용사’라는 일본군과 비슷한 영웅담이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서도 꼼꼼한 사실조사를 벌였다.


그는 6·25 영웅담이 상당수 날조·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일본군 출신 지휘관들이 부하의

죽음을 자신의 공적으로 미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2010년 무렵 이명박 정부는 백선엽을 한국군 최초 명예원수(5성 장군)로 추대하려고 시도했다.


이때 박경석은 자신이 필생의 과업으로 모아온 친일 행적 근거자료 등을 토대로 앞장서 반대했다.


외로운 그의 외침에 쟁쟁한 군 원로들이 동참했다. 이런 기세에 눌린 이명박 정부는 결국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 작전’에 백기를 들었다.


민족사 최대 비극인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또다시 백선엽이 소환됐다.


이번에는 그의 사후 국립현충원 안장을 둘러싼 논란이다. 박경석은 이 논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대전 유성구에 사는 박경석 장군 자택을 찾았다.


80대 후반의 고령임에도 시종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인터뷰에 응한 그는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도록 백선엽 미화에 매달리는 보수 진영에 대해 ‘가짜를 알면서도 신봉하면 참된 보수가

아니다’라고 개탄했다.


일본군 출신 장교들을 연구해오셨는데.


일본 군대 출신 장교라고 무조건 척결 대상으로 보지는 않는다. 비록 일본군 출신이라 해도

독립운동을 직접적으로 탄압하지 않고 해방 뒤 잘못을 인정한 다음 대한민국에 기여한

장군들도 많다. 자칫 잘못하면 백선엽 때문에 그분들까지 한꺼번에 매도당할까 하는 걱정이

없진 않다.


일본군 출신 사이에도 차이점이 있다?


그렇다. 과거 잘못을 인정하고 안 하고는 천지 차이다. 이종찬, 이한림 장군은 일본군 출신

이었지만 과거 잘못을 구체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김종오 장군도 부끄럽다고 고백했다. 그분들은 백선엽처럼 간도 특설대에 근무하거나

독립운동가를 혹독하게 다룬 적이 없다. 그러나 백선엽, 정일권 같은 일본군 출신은 끝까지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다.


간도 특설대 근무가 문제인 이유는?


일제 만행을 담은 역사 화보에서 사람 목을 칼로 베는 장면이 바로 간도 특설대가 조선 사람

죽이는 모습이다. 오랑캐의 손으로 오랑캐를 잡는다는 ‘이이제이 전법’을 적용해 조선인 손으로

조선인을 잔인하게 제압하라고, 일본군이 만든 부대가 바로 간도 특설대다.


백선엽은 간도 특설대에 지원병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일본과 중국에서 관련 증거서류를 다

확보했다. 국내에 나도는 백선엽의 간도 특설대 활동 증거는 모두 내가 수집해온 것이다.


자료를 어떻게 입수했나?


일본에 건너가서 간도 특설대 연구 전문가인 다나카 히사이로 박사를 만났다.

그가 모든 관련 자료를 넘겨줬다. 보니까 기가 막혔다. 백선엽은 한국군 생활을 마친

박정희~전두환 정부 시절에 일본을 오가며 기자들과 인터뷰하고, 일본어판 회고록까지 냈더라.


일본 만주군관학교 동기생들 모임에 나가서 간도 특설대에서 근무한 게 영광이라는 연설도 했다.


독립군과 조선인을 죽인 것도 군인으로서 임무를 수행한 거라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했더라.


백선엽은 1993년 일본에서 〈간도 특설대의 비밀〉이란 회고록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가 전력을 다해 독립군을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일본을 배반하고, 오히려 항일 게릴라가 되어 싸웠다고 해도 대한민국 독립이

빨라졌으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라는 소회를 밝혔다.


백선엽 같은 일본군 출신을 중용한 이승만 정부의 책임이 크지 않나?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군 출신을 활용했지만 나름 최소한도의 안전장치를 두었다.


국방부 장관을 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인 이범석 장군으로 앉혔다. 일본군 출신들에 대해선

후보생으로 받아 한국군 소위에서부터 시작하는 코스를 밟게 했다. 건국과 창군 초기에

어쩔 수 없이 일본군 출신을 썼지만 원칙은 지켰다고 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야심차게 밀어붙이던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를 좌절시켰는데.


간도 특설대에서 독립군을 잡았던 사람이 초대 명예원수가 되고, 영웅으로 부각된다면,

대한민국이 뭐가 되겠나? 대한민국 최초의 명예원수 추대라면 그 의미와 상징성이 매우 크다.


6·25전쟁 참전 원로 장군들이 백선엽 영웅화를 이구동성으로 반대했던 이유도 그것이다.


백선엽이 저지른 친일행위보다 6·25전쟁의 공을 더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6·25전쟁사를 모르는 일반인, 특히 정치인들은 마치 낙동강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이

인민군을 다 막아서 대한민국이 구출된 것처럼 주장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낙동강 전선이 240㎞였다. 그 전선에서 한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 즉 8개 사단이

합심해서 방어해낸 것이다. 백선엽은 그중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낙동강 방어에서 미군도 큰 역할을 했다.


미국 공군 B29 폭격기가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한·미 연합군 8개 사단을 지휘하면서 불퇴전의

결의로 앞장섰던 미군 워커 장군의 공도 컸다.


워커 장군은 나중에 교통사고로 작고했지만 우리 정부도 낙동강 전선의 공로를 기려 그의

이름을 딴 ‘워커힐 호텔’까지 만들었다.


날 일각에서 백선엽이 낙동강 전선을 혼자 사수한 것처럼 과장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누가 과장했나?


6·25전쟁 공로를 과장해 스스로 영웅화한 주역은 백선엽 자신이었다. 그는 군복을 벗은 뒤

박정희 정부 때부터 30년간 전쟁기념관에 사무실을 두고 출근하면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을 자원해 맡았다.


참전하지 않고 당시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이고, 백선엽 장군이 내신 6·25 관련

책이니까’라며 덮어놓고 찬양했다. 그러나 참전 장군들은 다 안다. 그분들은 백선엽 장군을

영웅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6·25전쟁의 진짜 영웅이 있다면?


당시 전쟁기를 통틀어 김홍일 장군과 김종오 장군 정도를 꼽을 수 있다. 김홍일 장군은 중국

정규군 중장 출신으로 일제 말기 임시정부 광복군 참모장을 지냈다. 6·25전쟁 초기 김홍일 장군

아니었으면 ‘대한민국’ 글자가 없어질 뻔했다. 이 역사가 아직까지 너무 묻혔다.


일본군 출신 백선엽 때문에 묻혔다. 국민들이 거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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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힌 이야기는?


6·25 개전 초기 국군이 무너져 내렸다. 개성의 1사단장 백선엽 대령은 전날 서울 육군회관

파티에 외출 나갔다가 6·25가 터진 그날 오전까지 부대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단장이 없는 동안 닥친 전쟁에서 1사단은 속수무책 후퇴했다. 임진강 남쪽의 일부 병사들이 고향 집으로 달아나버릴 정도로 부대는 엉망진창이 됐다.


백선엽에겐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이었다. 유재홍 준장의 의정부 7사단도 무너졌다.


춘천 지구를 방어하던 김종오 대령의 6사단만 제대로 싸우며 3일을 버텼다.


김종오 대령은 (전쟁 발발 전부터) 위기의식을 느끼며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대대장 이상 계급에 대해 전부 외박을 금지해두었다.


1사단과 7사단이 붕괴되자 김홍일 장군이 군 원로회의를 소집해 신성모 국방부 장관과 채병덕

총참모장을 앞에 두고, (북한군에 쫓겨 내려오는) 부대를 수습해서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주장했다.


신성모와 채병덕은 반대했다. 대구·광주·대전의 후방 3개 사단을 서울 근방으로 불러올렸지만

올라오는 족족 인민군의 공세에 붕괴됐다.


당신은 어디에서 싸웠나?


그때 나는 육사 생도로서 포천 전투에 나갔다. 부대가 완전히 붕괴되어 86명이 계급·군번도

없이 전사했다. 후퇴해서 수원으로 내려와 특공대를 모집해 한강 방어선에 참가했다.


광복군 원로인 김홍일 장군이 신성모·채병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만든 방어선이었다.


김홍일 장군이 한강 방어선을 적극 주장하니까 이승만 대통령이 그를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김홍일은 장교와 헌병을 진두지휘하면서, 1번 국도와 야산을 통해 썰물처럼 퇴각해 내려오는

국군 패잔병을 수습해 만든 임시 사단을 한강에 배치했다.


그해 6월28일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이틀을 주춤한 이유가 있다. 우선 북측은 한강 이북 서울

중심부를 점령한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을 다 차지한 거나 다름없다고 자만했다.


당시 북측은 인민군 2사단이 춘천에서 국군 6사단을 물리친 뒤 이천을 거쳐 수원 남방에

포위망을 구성해서 한국군을 궤멸시키는 작전을 세웠다. 그런데 춘천에서 (김종오의) 국군

6사단이 잘 버티며 그 작전을 무산시켰다.


아주 교묘하게 맞물렸다. 김홍일 장군이 한강 방어를 안 했거나 춘천에서 김종오 대령이

인민군을 막지 못했다면 나라가 무너지는 판국이었다. 두 사람의 작전이 맞아떨어지면서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르는 사흘을 얻은 것이다.


개전 직후 사흘이 중요했던 이유는?


미국 조야에서는 초기 전세로 판단할 때 참전 시점이 늦었다고 봤다. 오키나와로 이승만 정부를

망명시킨다는 말까지 돌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김홍일과 김종오가) 초반 3일을 벌면서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 결정에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 대한민국 구출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김홍일 장군과 김종오 대령의 공로는 백선엽의 초기 행각에 대비해보면 철저히 과소평가되었다.


이런 구체적인 전쟁사를 요즘 군인이나 군사 전문가들은 잘 모른다. 백선엽 영웅 만들기에

가려져버렸다.


백선엽의 1사단 병사들이 개전 초기에 인민군 전차를 육탄 돌격으로 막았다는데.


일본군 출신 일부 장군들이 스스로를 전쟁 영웅으로 미화하기 위해 과장하고 날조했다.


적 전차를 육탄으로 부쉈다는 심일 소령과 ‘육탄 5용사’, 적 토치카를 맨몸으로 파괴하고

장렬하게 산화했다는 ‘육탄 10용사’ 사건이 대표적인 해프닝이다.


육탄 10용사 중에서 한 병사가 북한 방송에 나와 귀순 월북을 종용한 사건은 (우리 군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이런 영웅들을 기리는 동상이 아직도 육사에 그대로 남아 있고, 교과서에도 실렸는가 하면

군가까지 만들어 불렸다. 그 뿌리는 일본 군국주의에 있다.


어떤 뿌리인가?


일제하 초등학교 교과서에 태평양전쟁에서 적의 전차를 파괴하고 목숨을 던진 ‘육탄 3용사’의

영웅담이 게재돼 있었다.


당시 조선 청소년들에게 그 글에 감동하라고, 혈서를 쓰라고 강요하면서 일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시켰다.


 영웅담은 일본 패전 후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백선엽 같은 일본군 출신 장군들이 똑같은

수법을 6·25전쟁사에서 되풀이한 것이다.


백선엽 장군이 6·25전쟁 가짜 영웅 만들기에 개입했다는 근거가 있나?


일본군 출신 장군들이 나에게 구체적으로 육탄 용사 영웅 만들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일본군 출신인 손 아무개 장군이 나에게 직접 그러더라. “월남전 영웅으로는 강재구 소령이

있지만, 일본군 출신 중엔 영웅이 하나도 없지 않으냐. 백선엽 장군이 직접 나서서 타당성을

주장하시는데 박경석 장군이 좀 도와달라.”


심일 소령에 대해서는, 내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으로 당연직 공적심사위원장을 맡았던

1980년대 초반의 1차 조사 당시, ‘이미 허구가 드러났다’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나를 백선엽

장군 방으로 데려가더라.


백선엽은 그 자리에서 나에게 ‘심일 소령을 영웅으로 만들자’고 이야기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거절하며 그 자리를 나와버렸다.


그런데 3년쯤 지나니까 육군사관학교에 심일 소령 동상을 세우고 ‘심일상’을 제정했다. 내가 손 장군한테 전화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손 장군은 “백선엽 장군이 참모총장한테 특별히

부탁해서 성사시킨 거니까 그런 줄로만 알고 잠자코 있어달라”고 했다.


역사의식 없는 역대 국방 수뇌부들이 만든 어이없는 해프닝이다. 육사, 삼사 등 군 간부

양성기관에서는 소위 ‘백선엽 도서 코너’를 따로 만들어 그를 칭송한다. 백선엽이 낙동강에서

싸워 혼자 대한민국을 지킨 영웅으로 만들어지니까,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으로 3개 프로젝트를 밀어붙였다.


하나는 명예원수 추대, 하나는 백선엽상 제정, 그리고 정부가 공적으로 간행하는 백선엽

회고록. 이 3개 프로젝트가 이명박 정부에서 결정됐는데, 내가 앞장서서 막았다.


백선엽 영웅화 반대 선언문을 발표했다. 당시 살아 있던 6·25 참전자들이 울분을 토하며 합류했다.


백선엽 지지 세력의 방해가 만만치 않았을 텐데.


맞아 죽더라도 잘못된 군 역사 하나는 바로잡고 죽겠다고 각오했다. 독립군을 잔인하게 죽인

일제 앞잡이가 대한민국의 초대 명예원수가 된다면 대한민국이 뭐가 되겠나.


대한민국 건국이념은 어떻게 되나. 자칫 북한의 6·25 남침이 ‘일제 잔재 소탕 전쟁’으로 정당화

되면 어떻게 하나? 이걸 바로잡지 않으면 이 나라가 세계적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거다.


보수 진영 내에서는 백선엽을 이순신 장군이나 홍범도 장군에 빗대 칭송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청춘을 야전에서 바친 군인으로서 스스로 보수라 자처하지만 나쁜 것까지 가지고 가는

보수는 참된 보수가 아니다. 가짜와 거짓은 털고 가야지, 속이고 갈 순 없다.


백선엽 장군의 국립현충원 안장 논란을 어떻게 보나?


비록 현행법상으로 백선엽이 현충원에 묻힐 자격을 가졌다 하더라도 내가 후손이라면 극구

만류하겠다.


그가 만일 국립현충원에 안장되면 역사의 후환을 면치 못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묻힐 곳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


백선엽 장군에게는 현충원 대신 인천에서 선인학원으로 ‘형제애’를 나눈 동생 백인엽씨가

묻혀 있는 가족묘가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한다. 


◎ 시사IN 정희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