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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위대한 패배자' 이시영 선생은 왜 역사적으로 '승리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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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7-08 10:56 조회7,47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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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이시영 선생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유형의 지도자이다.

조선왕조에서 태어나 대한제국의 한성재판소장ㆍ고등법원 판사 등을

지냈으며, 국치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의정원의원ㆍ

법무총장ㆍ재무총장 등 임정의 중축을 담당하고, 해방 뒤에는

대한독립촉성회위원장에 이어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대한제국→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삼대한(三大韓)'의

고위직을 역임한 인물은 그가 유일하다. 우리나라의 정통성과 법통의 정맥을

이은 분이다.

성재 선생은 '삼대한'의 법통을 씨줄로 삼아, 대한제국에서는 외교부 교섭국장으로서

을사늑약 저지에 사력을 다하다가 세불리 역부족하자 관직을 내던지고 재야에

나서 안창호ㆍ신채호 등과 신민회를 만들어 구국운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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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를 당하자 6형제가 뜻을 모아 전재산을 팔고 60여 명의 가솔과 함께

만주로 망명,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독립군기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3,500여 명의 독립군관을 양성하였다. 국내의 3ㆍ1혁명에 뒤이어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헌법기초위원으로 민주공화제 헌법(약헌)을

제정하고 법무총장으로서 임정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피눈물나는 풍찬노숙 망명 35년 만에 환국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하고,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독선독주에 맞서다가 부통령직을 내던졌다.


재야원로들과 함께 반이승만전선을 구축, 민주화운동의 초석을 놓고,

제2대 대통령후보에 추대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돌이켜보면 선생은 '위대한 패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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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으로 그는 늘 패배했으나 역사적으로는 승리자였다. 삼한갑족의 기득권과

전재산을 내던지고, 독립운동 시절에는 여러 단체의 수장(首長)을 마다하고,

대한민국에서는 부통령직을 내던졌다. 현실에서 큰 것을 내던짐으로써 역사의

자리에서 정석(正席)을 얻었다.

선생의 넉넉한 도량과 견결한 인품은 좁게는 형제간의 우애로부터, 넓게는

임시정부를 비롯 독립운동 진영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육신은 비록 5척 단구로

왜소하지만 옹골찬 기상과 황소 100마리가 끌어도 꿈쩍하지 않는 불굴의 신념은

85년 생애를 정도(正道)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게 하였다.

"그가 독자적인 조직을 만든 일도 없고, 활동에 치우침도 없었다.


항상 목소리 낮추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킨 인물이 바로 이시영이다.


또한 그는 격렬한 투쟁의 현장에 나서거나 좌우분화와 갈등의 길목에서 부딪히지

않고 조용히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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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군의 아들로 태어나고 비록 이국 땅에 세운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은

재무총장을 지내고도 자식들이 굶어죽어야 할 만큼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에

철저하고 청렴결백하여, 종국에는 셋집에서 숨을 거둬야 했던 깨끗한 지도자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이 어느날 그가 소유했던 옛 토지의 일부나마

되찾아주겠다고 했을 때 선생은 딱 잘라 대답한다.


"내 재산 찾으려고 독립운동한 게 아니오."


그의 재물관이 이랬고, 공사(公私)에 대한 처신이 이처럼 단호했다.


1930년대 우리 독립운동의 좌절기에 국내에서는 조선총독부가 중국에서 활동중인

이시영을 뒤쫓아 암살하고자 혈안이 되었다. 이 시기의 삽화 한 토막.

월남 이상재 선생은 국내에서, 성재 이시영 선생은 국외에서 투쟁의 장을 찾았다.


그러므로 3ㆍ1운동을 전후하여 이 나라의 눈동자 반짝이는 젊은이들은, "나라 안에는

월남, 나라 밖에는 성재가 계시어 어디를 가나 불빛을 볼 수 있다."라고 마음 든든해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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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1949년 8월 15일 성재 선생에게 건국대훈장을 수여하고, 1984년 12월에는

〈성재 이시영선생 기념사업회〉(초대회장 윤택중)가 설립되었다.


기념사업회는 1986년 서울 남산 백범 김구선생 동상 곁에 성재 이시영선생 동상을

세움으로써, 해방 뒤 한때 갈라섰던 두 분이 저승에서라도 다시 함께 하길 기원하였다.

성재 선생의 서훈을 시작으로 성장한 이들 6형제 모두가 서훈됨으로써 우리나라 서훈

역사상 형제 중에 가장 많은 분이 독립유공자 훈장을 받게 되었다. 

성재 선생은 1등급 훈장 대한민국장을 받고 남산에 동상이 세워지는 등 어느 정도

공적이 선양되었으나 직계 후손들은 가난에 쪼들리고 수유리 묘소는 여전히 황량한

상태에 놓여 있다.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까지 지낸 이시영이지만 그 후손들은 끈질기게 가난에

시달리며 살았고 이시영의 묘는 방치되다시피 했단다. 묘 옆의 무허가 주택에서

수십 년 동안 묘를 돌본 이는 이시영의 며느리 서차희 씨였어. 자신들의 결혼 축의금을

몽땅 싸들고 상하이로 달려갔지만 존경스러웠던 시아버지의 묘를 그는 떠나지 않았어.

기초생활 수급자로 근근이 살았던 서차희 씨는 2013년 10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며느리를 저승에서 만났을 때 대한제국 평안도 관찰사, 외교부 교섭국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 대한민국 부통령 이시영은 뭐라고 했을까.

"아가, 미안하구나. 이제는 내가 갚아주마" 하며 쌈짓돈이라도 손에 쥐여주지 않았을까.


문득 그 만남을 상상하다 보니 가슴이 더워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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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되 번쩍거리지 않는(光而不耀)' 성재 이시영 선생의 생애는 우리 근현대사의

정맥(正脈)이고, 정통(正統)이고, 법통(法統)이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사표(師表)이며,

선비형 지사의 표상(表象)이 아닐까.

그를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