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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한겨레:온] 8개의 이름을 가진 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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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5-20 14:14 조회7,38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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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독립운동에서 신분을 숨기는 것은 첩보와 군자금 운용, 무기구입을 위한 필수적 요소다. 최운산 장군도 여러 이명을 사용했다. 명길明吉, 풍豊, 문무文武, 빈斌, 운산雲山, 고려高麗, 만익萬益, 복福 등 알려진 것만 모두 8개다. 명길明吉은 어려서부터 사용하던 이름이다. 첫째 명록明祿 둘째 명길吉, 셋째 명순淳, 넷째 명철, 4형제의 이름에 모두 밝을 明자를 돌림으로 지었다. 


청년시절 최운산은 장작림부대에 참여했다. 뛰어난 무술실력으로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당시 신흥 무장세력인 군벌들이 발호하면서 군벌들 간의 전투가 종종 벌어지던 때라 최운산 장군이 전투에서 장작림의 목숨을 몇 번 구해주었다. 이런 배경이 있어 장작림의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기에 1912년 장작림부대를 그만두고 조선 동포들을 마적들로부터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소유지 봉오동에 사병부대를 창설할 때 장작림은 최운산의 요청을 기꺼이 허락했던 것이다. 


청나라에 말기 ‘도태의 난’이라 불린 연변도태 최우삼의 저항을 도와주고 목숨을 구해준 인연으로 한집에 살게 된 부친 최우삼의 지인을 사부로 모시고 무술을 익힌 최운산 형제들은 청년시절 당시 중국 동북삼성 지역의 지배세력인 장작림 군벌에 참여했다. 특히 기골이 장대한 최운산은 무술실력과 사격술이 뛰어나 장작림 군대의 군사훈련을 지도하는 위치였다. 


모든 것이 인간관계에서 시작한다는 중국에서 장작림의 신뢰를 받고 창설한 최운산의 사병부대가 봉오동 무장독립운동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이유다. 최운산은 장작림 부대에서 100여 명의 사병을 모집했다. 장작림의 허락이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당시 동북삼성의 주민이 대부분 조선인이고 사병으로 모집한 군인들도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무술실력이 뛰어난 몇 명의 중국인도 포함되었다.


이 봉오동 사병부대를 기반으로 ‘봉오동사관학교’를 운영하였고, 계속 늘어나는 병력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1915년 대규모 독립군기지를 건설하면서 본격적인 독립군부대 ‘도독부’로 발전한 것이었다. 이렇게 훈련된 ‘도독부’의 정예 병사들이 1919년 ‘대한군무도독부’가 되었고, 1920년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의 중심에서 10년 간 축적된 무장 역량을 발휘해 대한민국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맞붙은 대규모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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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에서 있을 때 그의 이름은 최풍崔豊이었다. 너그러운 성품과 재산가라는 의미로 풍요로울 豊이라 불렸다. 형 명록은 희喜로 동생 명순은 흥興으로 불렸다. 잘 웃지 않는 근엄한 성격의 명록은 좀 웃으며 지내라고 喜라 불렀고, 장난기 많고 재미있는 명순은 興으로 불렸다. 명길 외 다른 이름은 모두 자신이 직접 지었으나 豊은 장작림이 붙여준 이름이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설립되면서 형제들이 다른 일을 그만두고 무장독립전쟁에 본격적으로 투신하면서 이름을 최진동, 최운산(최문무), 최치흥으로 바꿨다. 기존의 독립군부대 ‘도독부’를 ‘대한군무도독부’로 재창설하면서 대한민국의 군인을 자임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최운산은 여러 활동을 하면서 이름도 여러 개를 사용해 자신의 신분을 숨기면서 활동했다. 독립군 대장 문무文武는 전투에 나설 때 주로 사용한 이름이다. "대한북로독군부 1대대장 최문무, 2대대장 홍범도...." 라고 기록된 서류가 남아있다. 대한북로독군부가 지휘 체계를 대대 단위로 개편할 때 1대대장을 맡아 홍범도보다 보다 먼저 호명되는 위치다.


최문무 대장이 1924년 모연활동 중 일제에 체포되어 1심에서 8년형을 선고받고 복심법원에 항소했다는 보도가 조선, 동아, 매일 3개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2심에서 형량이 줄어 실제로 최문무는 3년간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했다. 


대한북로독군부 참모장 최운산雲山은 신분을 바꿀때 마다 이름도 문무文武와 빈斌, 만익萬益 등으로 바꿔서 사용했다. 독립군을 지휘할 때는 문무文武와 문무文武두 글자를 합한 빛날 빈(斌)을 쓰면서 전투에 대비하는 의지를 반영했으나 사업가로 일할 때는 모든 사람한테 이로운 일을 하겠다는 의미로 만익萬益이라 불리길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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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 최만익은 무조건 이윤만을 앞세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업에서 나오는 생산품이 생활에 꼭 필요한 것으로, 그리고 낮은 이윤을 운영의 기준으로 삼았다. 국수공장, 콩기름공장, 콩과자공장, 양조장, 성냥공장 비누공장 등등 모든 생산품의 원자재가 모두 최만익의 드넓은 농토에서 나오는 곡물들이었다. 생산 원가 대비 이윤이 높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연변의 여러 지역이 도시화되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고 최만익이 생산하는 생필품은 날개 돋치는 듯 팔려나갔다. 손을 대는 사업마다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고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면서 재벌 기업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최만익이 벌어들인 수입의 대부분이 농산물이 아니라 기업을 통해 벌어들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한 달 간 농사로 얻은 수익보다 공장에서 하루 벌은 수익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최만익의 재산이 불어나면서 늘어난 병력을 완전무장할 군자금이 충분히 확보되었고 만주 독립군의 숫자도 빠르게 늘어났다. 필요한 만큼의 신형 무기도 구입할 수 있었다. 최만익은 연해주의 독립군들과 오랫동안 연대하고 지원하면서 활동하고 있었다. 러시아로 곡물과 소를 대규모로 수출하는 무역업자로 한 번에 수백 마리의 소를 판매하고 있었기에 재산이 계속 불어날 뿐만 아니라 신형 무기 구입 루트가 확보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로 러시아 군인들이 뒤로 빼돌린 무기나 퇴역 군인의 무기를 지속적으로 구매하고 있었다. 670명 규모의 대한군무도독부 군인들은 이미 완전무장이 되어 있었으나 임시정부 수립 후 만주 독립군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많은 무기가 필요했다. 그러던 중 당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체코군단이 시베리아를 횡단해 블라디보스톡에 장기간 머물면서 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최운산(최고려)은 전쟁이 끝나 무기보다는 현금이 필요한 그들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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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북로독군부군(사령관 최진동)이 “러시아에서 소총 500정, 탄환 5만발, 권총 430정, 권총탄환 5000발, 기관총 2문 구입했다는 1920년 3월 19일의 일제문서와 4월 5일 소총 700정을 구입했다는 일제보고서가 남아있다. 당시 최운산의 재력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규모다. 러시아에서 무기를 구입할 때는 최고려崔高麗란 이름으로 서명했다.


그 외에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족보에 올린 이름 복福이 있다. 최운산은 알려진 것만 8개의 이름으로 자신을 나누고 다양한 방법으로 신분을 감추었다. 그의 삶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이유다. 그는 가족들도 분장 전과 후를 구별하지 못한 변신의 귀재였다. 봉오동과 북만주에서 성공적으로 무장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비결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최운산이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고 그의 독립운동 공적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 최성주 객원편집위원  immacolet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