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저고리 고름 날리며 / 일본 칸다구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칼 찬 순사 두려워 않고 / 2·8 독립의 횃불을 높이든 임이시여!
그 불씨 가슴에 고이 품고 / 현해탄 건너 경성 하늘 아래
모닥불 지피듯 독립의지 불붙이며 / 잠자는 조선여자 흔들어 깨워
스스로 불태우는 장작이 되게 하신 이여!“
위는 이윤옥 시인의 <잠자는 조선여자 깨워 횃불 들게 한 ‘김마리아’> 시의 일부입니다. 오늘은 김마리아(1892.6.18-1944.3.13) 선생이 고문후유증으로 눈을 감은 날입니다. 지난해 6월 18일 서울 정신여고를 방문한 일본 고려박물관 이사 도다 미츠코(戶田光子) 씨는 “김마리아 열사가 생전에 입었던 흰 치마저고리를 직접 보고 눈물이 왈칵 났습니다. 특히 저고리 앞섶 길이가 서로 다른 이유를 설명 들었을 때 일제 경찰의 악랄한 고문이 얼마나 심했나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서울 정신여고 김마리아회관 안의 전시실에 전시된 선생의 저고리 안섶과 겉섶의 길이가 다른 까닭은 일제의 고문으로 한쪽 가슴을 잃었기에 정상인들이 입는 저고리를 입을 수 없어 특별히 지은 옷이기 때문입니다. 김마리아 애국지사는 동경유학 중 1919년 2·8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가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베껴 변장한 일본 옷띠인 오비 속에 숨기고 차경신 지사와 함께 부산항에 들어왔습니다. 3·1만세 운동의 도화선은 바로 동경유학생을 주축으로 한 이들이 목숨 걸고 삼엄한 왜경의 눈을 피해 국내에 소식을 전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이 일로 왜경에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아무리 나를 고문한다 해도 내 속에 품은 내 민족, 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너희가 빼내지 못할 것이다.”라면서 당당히 맞섰는데 이때 머리를 심하게 내리친 고문 탓으로 코와 귀에 고름이 생기는 병에 걸렸고 심한 두통과 신경쇠약을 평생 달고 살아야 했지요. 이후 선생은 미국 유학 도중 황애시덕ㆍ박인덕 등과 함께 근화회(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재미한국인의 애국정신을 떨쳐 일으키고 일제의 악랄한 식민정책을 서방국가에 널리 알리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선생은 고문 후유증으로 1944년 3월 13일 52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지요.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