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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밸런타인데이, 초콜릿보다 안중근 의사를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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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2-11 09:27 조회6,45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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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2월 14일이 되면 사랑하는 연인들은 카드나 초콜릿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확인한다.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 알려져 있다. 이 날이 되면 짝사랑 중인 여성들은 남자 친구에게 보기 좋고 맛있는 초콜릿을 건네주며 어떻게 사랑을 고백할지 고민이 많을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상업적으로 변질시킨 밸런타인데이

이른바 ‘밸런타인데이(Saint Valentine’s Day)’라 불리는 이날의 유래는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서기 3세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제국의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Caludius II)는 게르만족 약탈자들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대군단을 이끌고 원정을 떠난다. 이때 황제는 더 많은 남자들을 군에 입대시키고 군인들의 군기 문란을 막기 위해 결혼을 금지하는 금혼령을 내린다.

황제의 금혼령으로 사랑하면서도 결혼을 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안타깝게 여긴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밸런티노 주교는 금혼령에 반대하는 연인들을 교회로 몰래 불러 결혼식 주례를 서주며 사랑을 성사시켜 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밸런티노 주교를 처형했다. 269년 2월 14일의 일이었다. 


이후 서양에서는 밸런티노 주교가 순교한 2월 14일을 기념하며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이 내려오게 되었는데 이게 밸런타인데이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설은 겨우내 추위에 움츠렸던 새들이 잠에서 깨어나 짝짓기를 시작하는 날이 2월 14일이라고 믿는데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사랑하는 연인들이 순수하게 선물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서양의 풍습은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상업적 목적과 결합하여 변질되기 시작한다.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에 의해 밸런타인데이의 풍습이 전해지게 되었고, 1930년대 일본의 한 제과회사는 마케팅의 일환으로 ‘고마운 사람들에게 초콜릿을 선물 하자’는 판촉 행사를 벌인다. 이후 다양한 방법으로 초콜릿 이벤트는 지속된다.

1950년대 서구에서 시작된 여성해방 운동과 함께 시작된 페미니즘 운동이 일본으로 확대되면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게 되자, 이제는 ‘여성들도 남자들에게 선물을 줄 수 있다’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일본의 대기업들은 대대적인 초콜릿 판촉행사를 통하여 밸런타인데이를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로 만들었으며 이런 문화는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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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탕! 탕!··· 코레아 우로!  일제의 심장을 쏘다

성 밸런티노 주교의 순교를 추념하는 성스러운 날, 2월 14일은 초콜릿보다는 또 다른 ‘성스러운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111년 전,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 승강장에 여섯 발의 총성이 울렸다.

대한민국의 한 청년이 코레아 우로!(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권총 세발을 발사해 조선 침략의 원흉, 일본의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다. 나머지 세발로 일본 총영사와 수행비서, 일본인 관리를 쓰러뜨린다. 역사가 바뀌는 찰나의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다 알고 존경하는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의사의 ‘하얼빈 의거’다. 안 의사는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일본군으로 압송된 뒤 중국 뤼순 감옥에 투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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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910년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여섯 차례의 졸속 재판 끝에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6일 안의사는 순국한다. 엄혹한 시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죽는 순간까지 ‘동양평화론’을 외치며 당당하게 스러져간 안의사의 나이 31세였다.

위대한 인물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는 법이다. 안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담담하고 단호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낸다.

감옥에 수감된 아들에게 수의를 지어 보내며 쓴 어머니의 편지는 언제 읽어도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말한 어미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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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뜻에 따라 항소를 포기한 안 의사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 어머니가 하얀 명주천으로 지은 수의를 가져온 두 동생, 정근과 공근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았다.

 “···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내가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국권이 회복된 지 75년이 지났지만, 안 의사의 유언은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일제는 안의사의 묘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해 유해를 가족에게 인도하지 않고 뤼순 감옥 담장 바깥에 묻었으나 아직 까지 묘소를 찾지 못하고 있다. 서울 효창 공원 ‘삼의사 묘역’에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하루빨리 고국으로 모셔올 수 있기를 빌고 또 빈다.


조국 광복을 위해 일제의 심장을 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 31세 젊은 우리의 영웅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 이날은 일본인들이 교묘한 상술로 만들어낸 초콜릿보다는 ‘안중근 의사의 성스러운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날’이다. 기억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되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