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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뉴시스] 임정 요인들, 환영식 없이 쓸쓸한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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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2-18 09:38 조회6,62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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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박진희 기자 = 7. 개인 자격으로 환국(還國)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나와 나의 각원(閣員) 일동은 한갖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완성을 위하여 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 동포가 하나로 되어 우리의 국가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귀국 다음 날인 11월 24일 경성방송국에서 방송을 통해 귀국 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평민 자격’을 강조한 그의 방송은 1919년 3·1운동의 결실로 탄생한 뒤 26년간 풍찬노숙(風餐露宿)을 견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입국 과정 자체가 순탄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10일 해방 닷새 전에 일본 항복 소식을 중국에 진주하고 있던 미군으로부터 전달받았다.

김구 주석은 당시 광복군과 미군 전략국(OSS)이 공동훈련 하던 시안(西安)을 방문 중이었는데, 해방의 기쁨보다는 장탄식을 터트렸다.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해 교전국으로 승인받으려던 구상이 무산돼 연합국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아무런 발언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9월 5일 김구 주석 일행은 충칭(重慶)에서 비행기로 상하이(上海)에 도착해 교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두 달 넘게 임정 요인들은 발이 묶였다. 비행기를 내줘야 할 미군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다. 김구 주석이 우려한 대로 ‘임시정부’ 자격으로 입국하느냐, 미군의 요구대로  ‘개인’ 자격 입국을 수용하느냐가 핵심 쟁점이었다. 그 사이 10월에 이승만 박사가 개인자격으로 서울에 입국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결국 김구 주석은 11월 19일 중국 주둔 미군 사령관 웨더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와 최근까지 충칭에 주재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이 항공편으로 입국하는 것과 관련하여 나와 동료들이 공인 자격이 아니라 엄격하게 개인 자격으로 입국이 허락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바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입국하여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행정적,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로서 기능하지 않을 것을 선언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미군정이 한국인들을 위해 질서를 수립하는 데 협조하는 것입니다.” 

편지 형태였지만 사실상 임시정부 자격을 포기하는 ‘서약서’였다. 미국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찌감치 ‘한반도를 신탁통치 한다’는 확고한 전후 대한정책을 수립한 뒤 실현방안을 모색했고, 종전 뒤에도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임정을 망명정부로 대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맥아더 사령관-하지 사령관으로 이어지는 태평양지구의 미군 수뇌부도 이승만과 달리 임정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남한 주둔 미군사령관 존 하지 중장은 11월 2일 참모회의에서 “김구는 스튜(stew, 물과 여러 식재료를 섞어서 만드는 수프와 흡사한 요리)의 간을 맞추는 소금에 불과하다”고 발언할 정도였다.

김구 주석이 ‘서약서’를 쓴 뒤에야 미군은 수송기를 제공했고, 마침내 임정 요인 귀국 1진 15명이 11월 23일 오후 1시 상하이를 출발했다. 이들은 오후 4시 40분 김포비행장에 도착해 아무런 환영행사 없이 곧바로 숙소인 죽첨장(竹添莊, 후에 경교장.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자리)으로 향했다. 죽첨장에는 이승만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 총재만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들이 숙소에 도착한 뒤에야 하지 사령관은 ‘오래 동안 해외에 망명 중이던 애국가 임시정부주석 김구 선생 일행 15명은 금일 오후 경성에 개인자격으로 도착하였다’라고 발표했다. 이렇게 임정 요인들의 귀국은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고 기다리기에 가슴을 조이던” 환영준비위원회 조차 모를 정도로 조용하게 이뤄졌다.

당시 수행원으로 들어온 장준하(張俊河)는 김포공항 착륙했을 때의 심정을 후에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벌판뿐이었다. 일행이 한 사람씩 내렸을 때, 우리를 맞이하는 건 미군 병사들 몇이었다.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깨어지고 동포의 반가운 모습은 허공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조국의 11월 바람은 퍽 쌀쌀하고, 하늘도 청명하지 않았다.… 나의 조국이 이렇게 황량한 것이었구나. 우리가 갈망한 국토가 이렇게 차가운 것이었구나. 나는 소처럼 힘주어 땅바닥을 군화발로 비벼댔다. 나부끼는 우리 국기, 환상의 환영인파, 그 목 아프도록 불러줄 만세 소리는 저만치 물러나 있고, 검푸레한 김포의 하오가 우리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나마 1진은 사정이 좋았다. 조소앙, 김성숙 등 임정 2진의 귀국과정은 더 참담했다. 이들은 1945년 12월 1일 미군 수송기 편으로 귀국했지만 쏟아지는 눈으로 김포 비행장에 착륙하지 못하고, 눈이 쌓이지 않은 곳을 찾아 남진하다 오후 3시가 돼서야 옥구비행장(군산)에 착륙했다. 그리고 방한도 되지 않는 미군 트럭을 타고 엄동설한에 시골길을 달려 서울에 도착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노혁명가’들은 여전히 고역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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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주석은 귀국 다음날인 1945년 11월 24일 미군정청을 방문해 남한 주둔 사령관 하지 중장과 만난 후 군정청 출입기자단과 기자회견을 했고, 다음 날 33인 대표로 활동한 오세창(吳世昌)을 만났고, 오후에는 돈암장(敦岩莊)으로 이승만 독촉중협 총재를 방문해 정세 협의를 했다.  


12월 초 임시정부 의정원 홍진(洪震) 의장, 김원봉(金元鳳) 군무부장(軍務部長)을 비롯한 대다수 국무위원과 각료들이 귀국한 후 마침내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15만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전국환영대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홍명희( 洪命憙)와 송진우 한국민주당 수석총무의 환영사, 러취 미군정장관의 축사가 있은 후 등단한 김구 주석은 “임시정부는 결코 모 일 계급(某一階級) 모 일 정파(某一黨派)의 정부가 아니라 전민족 각계급 각당파의 공동한 이해입장에 입각한 민주단결의 정부”였다고 강조하고, “지금 우리는 국토와 인민이 해방된 이 기초 위에서 우리의 독립주권을 창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급하고 중대한 임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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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월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전국환영대회’를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은 임시정부 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후 한반도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이 알려지면서 정국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격랑 속으로 빠져든다.

이러한 격랑 속에서 충칭에 남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가족 100여 명이 1946년 1월 하순 길고 서글픈 귀국길에 올랐다.  

이들은 버스와 배, 기차를 번갈아 타고 2월 19일 상하이에 도착해 2달 반이나 기다려 5월 초에 상하이 부두에서 미군이 제공한 수송선을 간신히 탔다. 김의한(金毅漢) 광복군 정훈처 선전과장의 부인이자 대한애국부인회 훈련부장으로 활동한 정정화(鄭靖和) 선생은 “우리는 난민이었고 거지떼였다. 난민선은 가축 수송선이나 다름 없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3일만에 부산에 도착한 이들은 방역과 통관을 위해 난민수용소에 들어갔다가 부산역에서 화물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임시정부를 지키며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치고 싸웠지만 정작 해방된 조국에서 이들은 임시정부 귀국 1진, 2진과 마찬가지로 난민 취급을 당해야만 했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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