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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국제신문] “이념 논리에 매몰돼 약산(김원봉의 호)을 모독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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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11-08 10:46 조회7,28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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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사 핵심 인물인데도
- 월북 이유로 공적 안알려지고
- 서훈 둘러싼 찬반 논란 불거져
- “정권따라 역사 평가 오락가락
- 같은 민족으로서는 불행한 일” 


오는 10일은 1919년 중국 만주에서 대표적인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이 결성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에 맞춰 국제신문 취재진은 7일 의열단장이었던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사진) 선생의 처조카인 박의영(73) 목사를 만났다. 박 목사의 부산 수영구 자택에는 ‘독립유공자의 집’을 알리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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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선생의 처조카인 박의영 목사가 7일 부산 수영구 자택에서 유년 시절 힘들었던 가정사와 의열단 결성 100주년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김성효 전문기자


박 목사가 안내한 방에는 아버지 박문희(1901~1950) 선생의 사진이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에 있었다. 그는 부산 출신의 여성 독립운동가이자 여성 의열단원인 박차정(1910~1944) 의사의 조카다. 박 의사의 첫째 오빠가 박문희 선생, 둘째 오빠가 박문호(1907~1934) 선생이다. 1910년 5월 8일 부산 동래 복천동에서 출생한 박 의사는 경남 밀양 출신으로 조선의열단을 이끈 약산 선생의 아내다. 박 의사는 동래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에 의해 옥고를 겪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1931년 김원봉과 결혼하고 이듬해 남편과 함께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했으며 제1기 여자 교관으로 활약했다. 정부는 박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박 목사는 현재 박문희 박문호 박차정 의사 유족 대표다.

박 목사는 “어린 시절에는 의열단이라는 단어 자체를 듣기 싫어했다. 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당시 정부에선 아버지가 월북했다고 추정해 매달 우리 가족은 신원조사를 받았다.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것”이라며 “이후에도 외부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살았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 반항심이 컸다”고 말했다. 가슴 아픈 가정사를 말하던 박 목사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시울을 붉혔다.

박문희, 문호 선생은 의열단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한 탓에 항일독립운동사에 드러나지 않았다. 박 목사는 집안 사정 등 기록을 후대에 알리고자 1990년대 초반부터 집안의 독립운동사 자료를 모았다. 국내는 물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대 자료실 등에서 자료를 수소문했다. 이런 노력으로 박문희 선생은 지난해 11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박문호 선생이 이달 유공자 서훈을 받으면 부산에서는 유일하게 한 집안에서 독립유공자 3명이 배출된 사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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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산 김원봉 선생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핵심 인물인 약산 김원봉 선생은 1948년 월북했다는 이유로 공적의 많은 부분은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현충일에 문재인 대통령이 김원봉 선생을 언급하면서 서훈을 둘러싼 찬반 논란이 불거졌다. 북한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당시 김원봉 선생을 국군 창설과 한미동맹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했다.

이에 대해 박 목사는 “정권에 따라 역사를 달리 평가한다는 것은 같은 민족으로선 불행한 일이다. 역사를 바로 알고 평가해야 한다”며 “1948년 뒤늦게 북한에 간 약산은 내각구성에서도 군이나 당 실권에서 밀려나 명목상 한직인 국가검열상에 불과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한국사가 이념 논리에 함몰돼 역사 왜곡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며 “정권 또는 학자에 따라 역사를 소멸, 단절, 축소시키는 행위가 더는 없어야 한다. 약산을 모독하지 말라”고 단호히 강조했다.

김원봉 선생은 1952년 노동상에 임명됐으나 1958년 김일성 체제에서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숙청을 당한 탓에 묘소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도 어렵다. 최근에는 3·1운동과 의열단 창단 100주년을 기념해 김원봉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서적 ‘민족혁명가 김원봉’이 출간됐다. 박 목사는 “의열단 결성 100주년은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라 민족독립을 위해 항일 의열투쟁에 앞장선 분들의 정신을 후대가 본받고 제대로 계승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미희 기자 maha@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