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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의열단100주년] ⑮김원봉, 남북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한 비운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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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11-03 14:21 조회7,19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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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19년 11월10일. 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젊은이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의열단을 결성했다. 뉴시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견되는 의열단의 창단 100주년을 맞아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도움으로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들을 매주 소개한다.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음에도 잊혀져만 가는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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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약산 김원봉. (사진=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김성진 기자 =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독립운동가지만, 결국 남과 북 모두에서 버림받고 시신조차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사라져 버린 인물이다.

1898년 9월28일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1910년 8월29일 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목격한다. 1916년 독립을 위한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단독으로 중국 텐진(天津)으로 건너가 덕화학당에서 유학한다. 


1918년 다시 난징(南京)에 있는 금릉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국내에서는 1919년 비폭력운동인 3·1혁명이 일어난다. 이 소식을 들은 김원봉은 만주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 신식 군사훈련을 받는다.

1919년 11월9일 김원봉을 비롯한 13명의 조선 청년들은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농부 반씨 집에서 비밀리에 모여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한다. 모임은 다음날까지 이어진다.

의열단은 김원봉을 맏형 격인 의백(義伯)으로 선출하고 조직 목표와 투쟁방안을 천명한 공약 10조,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대상 7가살(七可殺), 파괴해야 할 다섯 일제 기관 5당파(五當破)를 만든다.

김원봉의 지휘 하에 1920년 3월 곽재기·이성우·신철휴·배중세·황상규 등의 밀양·진영 폭탄반입사건, 1920년 9월14일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투척의거, 1920년 12월27일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 1921년 9월12일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투척의거, 1922년 3월28일 오성륜·김익상·이종암의 상하이황포탄 의거, 1923년 1월12일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후암동·효제동 의거, 1924년 1월5일 김지섭의 동경 니주바시(이중교) 폭탄 투척의거, 1926년 12월28일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등 여러 형태의 투쟁이 전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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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약산 김원봉. (사진=KBS 캡쳐)


그런 와중에 의열단의 폭력적 독립운동에 대해 비판과 비난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의 이념 및 방략을 정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의열단의 김원봉은 단재 신채호 선생에게 의열단 선언문을 작성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한다. 당시 베이징에 머물러 있던 신채호 선생은 의열단이 일제와 싸우는 명분, 의혈투쟁의 정당성을 장려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한다.

항일선언문의 백미이자 독립운동사 불후의 명작으로도 일컬어지는 조선혁명선언은 일제의 침략과 압제를 겪으면서 성장한 민중세력을 일제의 식민통치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약탈적·불평등적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주역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어 의열투쟁 노선의 재검증 필요성에 직면한 의열단 지도부는 중산대학(中山大學)과 황포군관학교(黃?軍官學校) 입교를 통한 자기무장의 길을 선택했다.

1926년 봄 김원봉은 동지들과 황포군관학교 교장실 부관 겸 교관으로 재직 중이던 손두환 선생의 중개로 장제스 교장을 만나고 황포군관학교 입교 및 학비면제 승낙을 받았다. 김원봉은 의열투쟁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신식훈련을 받기 위해 최림(崔林)이라는 가명으로 광저우(?州)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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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단재 신채호 선생이 1923년 의열단의 독립운동이념과 방략을 이론화해 천명한 '조선혁명선언'. 2019.06.07. (사진=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그곳에서 쑨원(孫文)의 삼민주의와 중국의 혁명사상을 학습했고, 좌파 계열의 교관과 학생들과도 접촉하면서 조선혁명청년회를 조직했다. 당시 저우언라이(朱恩來)는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부주임이었다.

김원봉은 폭력과 암살을 포함한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추구했었기 때문에 장제스(蔣介石)의 중국 국민당이나 상해의 민족주의 우파들의 온건하고 소극적인 항일 노선에 실망했다. 그는 폭력에 의한 혁명을 골자로 하는 공산주의 운동노선에 한동안 빠져든다.

1927년 8월 황포군관학교 때 스승이었던 저우언라이를 중심으로 한 난창폭동(南昌暴動·중국공산당이 장시성 난창에서 일으킨 무장봉기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김원봉은 단원들이 전멸하는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이로써 의열단은 완전히 와해되는 위기를 맞았다.

이후 김원봉은 1929년 소련 공산당과 접촉하여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으로부터 지원을 받으면서 '레닌주의' 창간호를 발간한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코민테른이나 중국 공산당과의 협력을 거부하며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기로 한다.

1931년 9월에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김원봉은 의열단을 재조직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 총수 장제스로부터 지원을 받아 1932년 난징(南京)에서 군사간부 육성을 위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 취임한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이른바 '의열단 간부학교'라고도 불렸으며, 입학생들에게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철학, 조선운동사, 한글, 조선역사, 한국지리, 비밀공작법, 폭탄제조법, 기관총조법, 실탄사격 등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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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조선의용대 성립기념 사진. 조선 의용대는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 등이 일제에 맞서 싸우기 위해 만든 독립운동부대다. 이후 조선의용대원 일부는 조선의용군으로, 다른 일부는 한국광복군에 합류했다. 2019.06.19. (사진=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1932년 11월 상하이에서는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과 임시정부의 해체를 목적으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한국광복단동지회 등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는데, 여기에 의열단도 함께 참여했다.

그 결과 1935년 7월 난징(南京)에서 김규식, 신익희 등이 중심이 돼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한국광복단동지회, 의열단이 하나가 되는 진보적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결성됐고 김원봉이 총서기가 됐다.

민족혁명당은 '단일과 통합'을 기치로 내세웠지만, 사회주의계와 민족주의계 사이 이념 논쟁과 갈등이 심화되면서 창단 두 달 만인 9월 당명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바꾸게 된다.

각지에서 항일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자, 1937년 12월 중국 난징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조선민족해방자동맹의 김성숙,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최창익, 조선혁명자연맹의 류자명 등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해 중국 국민당 및 공산당이 지도하는 각종 단체와 연락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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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박차정 선생과 김원봉 선생의 결혼기념사진. (사진=국가보훈처 제공) photo@newsis.com
 
1938년 10월1일 김원봉은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의 지원하에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한커우(漢口)에서 김성숙과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고 본인이 대장에 오른다. 중일전쟁 시기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을 맞아 다대한 공적을 세운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한국광복군이 창설되고, 1941년 김원봉은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회 회의를 거쳐 충칭(中慶)에 있던 임시정부와 통합을 하기로 한다.

김원봉은 1942년 5월 자신이 이끌던 조선의용대를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시키고 자신은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이 된다. 좌우합작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김원봉에게 비극이 닥친다. 의열단 단원이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이며 부인이었던 박차정이 1939년 2월 중국 장시성 곤륜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후 김원봉은 1944년 4월22일 임시정부 군무부장(현 국방부장관)에 취임해 조국의 독립을 준비한다. 그러나 독자적인 작전을 준비 중이던 1945년 8월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해방이 이뤄진다. 김원봉은 1945년 12월2일 임시정부 군무부장 자격으로 고국에 돌아온다. 망명한지 28년 만이었다. 그러나 28년 만에 돌아온 조국은 찬탁과 반탁으로 남북이 갈라져서 사분오열(四分五裂)이 돼 있었다.

1946년 2월19일 김원봉은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결성해 공동의장으로 추대됐고 김구, 김규식 등과 더불어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주도했다. 그러다가 1947년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의 지시로 미군정 소속 친일 경찰 앞잡이 노덕술에게 체포돼 온갖 모욕과 협박을 당했다.

그 무렵에 백범 김구 선생은 암살당했고 몽양 여운형 선생도 피살당했다. 이런 과정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김원봉은 1948년 남북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열릴 때 월북을 결행했고, 북한에서 국가 검열상(서열 7위), 노동상,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지만 결국 1958년 9월 숙청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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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김원봉 휘호. 2019.11.03.  (사진 제공 =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photo@newsis.com

최근 발굴한 평양 주재 소련 대사 알렉산더 푸자노프의 일지는 "체포 직전에 남쪽으로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을 사용한 전 최고회의인민회의 부위원장 김원봉(현재 체포돼 있음)과 교류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일지는 일기 형식으로 북한 정계 동향을 기록해 본국에 보고하는 문건이었다. 김원봉이 김일성과 그 세력들의 탄압을 피해 다시 월남을 시도한 것으로 읽힌다.

김원봉은 이후 북한 관련 기록에서 아예 자취를 감췄다. 납북·월북 독립운동가들이 묻힌 평양 애국열사릉에도 그의 묘는 없다. 어디에 있는지 현재로서는 찾을 길이 전혀 없다.

의열단장 김원봉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투쟁을 하고서도 해방된 조국에서 설 땅을 잃어버린 비운의 독립운동가로도 평가된다.

올해는 의열단 창단 100주년이지만 김원봉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분분하다. 그는 광복 74주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과 북, 그 어느 곳에서도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지금도 이념전쟁 중심에 서 있다. 끝.

ksj87@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