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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포토인북]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변절·투항자가 없었던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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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10-23 11:59 조회6,25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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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서믿음 기자] 의열단.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독립운동단체다. 올해는 의열단이 창단된지 100년이 되는 해. 의열단은 1991년 11월 10일 중국 지린성에서 김원봉을 포함해 조선 열혈청년 열세명이 뜻을 모아 창단됐다. 정의로운(義) 일을 맹렬히(烈) 실행하는 단체(團)라는 뜻으로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대상(7가살)'과 '다섯 가지 파괴대상(5파괴)'를 정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창단 후 10년간 크고 작은 의열투쟁을 34번이나 일으키면서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항일단체로 우뚝 섰다. 창단 단원들은 일제 군경과 밀정들에게 쫓겨, 수시로 황천길을 넘나들면서도 한 사람도 변절하거나 투항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만 해방 뒤 귀국한 의열단원들은 남북 어디에서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채 잊히거나 소외당하거나 제거되는 불운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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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서출판 두레]


의열단 창단 '주역'이 김원봉이 아니라 황상규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의열단원 이종암의 동생 이종범은 "창단 혈맹을 굳힌 그날 군정서 일 때문에 자리를 같이하지 못했을 뿐 이미 동지들은 황상규를 의백으로 모셨다. 그리고 부단장으로는 이종암이 정해졌다"라고 황상규의 초대 의백설을 주장한다. 이종범은 또한 황상규 대신 김원봉이 의백이 된 사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 번째 총공격 때 단장 황상규 이하 모든 동지들이 국내로 입국해 활동하다가 검속을 당했다.(김원봉만 해외에 남아 있었음). 때문에 검속을 당한 그분들이 왜경이나 왜법정에서 한결같이 김원봉을 단장이라고 해버렸다. 김원봉은 그 후에서 계속 해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자타가 공인한 의백(단장)이 된 것이다. <4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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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서출판 두레]


의열단이 어렵게 구해서 보낸 폭탄을 압수하고 단원들을 구속한 곳은 부산경찰서였다. 의열단은 이 사실을 알고 일 일에 관련된 자들을 응징하기로 했다. 김원봉은 1920년 8월에 부산 출신 단원 박재혁을 상하이로 불렀다. 김원봉은 상하이에 온 그에게 동지들의 복수를 위해 곧 부산으로 출발할 것을 명했다. 9월 14일 아침, 박재혁은 중국인 고서적상으로 변장하고, 부산경찰서에 가서 서장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박재혁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가 고서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듣고 고서를 잔뜩 싸 들고 갔고, 아무것도 모르는 하시모토는 이것저것 고서적을 뒤적이며 구경하는 데 여념이 없는 사이 박재혁은 의열단의 전다을 내보이며 유창한 일본말로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려 한다"고 질타하고 나서 그에게 폭탄을 던졌다. 이 거사는 의열단의 거사 중 가장 성공한 의거 중 하나이다. 체포된 박재혁은 (단식 투쟁 중) 1921년 5월 11일 대구감옥에서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63~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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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서출판 두레]

의열단은 부산경찰서 폭파를 성공시킨 뒤 다시 의거 대상으로 밀양경찰서를 골랐다. 총독부 폭파미수 사건으로 밀양 출신 의열단원들이 여럿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어서, 동지들의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작용했을 터였다. 1920년 12월 27일 오전 10시 40분경, 경남 밀양경찰서에서는 서장 와타나베 스에지로가 간부 열아홉명을 청사 안 사무실에 모아놓고 연말 특별경계를 당부하는 훈시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폭탄이 터졌다. 첫 폭탄은 순사부장 오른팔에 맞고, 두 번째 폭탄은 마룻바닥에 떨어졌으나 폭발 위력이 약해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었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밀양 출신 의열단원 최수봉이었다. 최수봉은 사형선고를 받고 1921년 7월 8일 대구감옥에서 순국했다. <67~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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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서출판 두레]


1921년 9월 12일 오전 10시경, 한 청년이 전기공 차림으로 조선총독부 통용문을 지나 유유히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 총독 집무실로 보이는 방에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청년은 다음 방문을 열고 다시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요란한 폭음과 함게 마룻바닥과 탁자와 유리창 등이 파괴됐다. 총독부 청사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의열단원 김익상이었다. 총독 집무실로 짐작되는 방에 폭탄을 던진 그는, 혼비배산해 허둥대는 일경들에게 진짜 전기공인 것처럼 위험하다고 소리치면서 유유히 총독부 건물을 빠져나왔다. 여간한 담력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일제의 검문을 피하려고 철공원으로 변장한 그는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 신의주를 거쳐 1주일 만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김익상의 의열투쟁은 한개 사단 병력이라도 해내개 어려운 장쾌한 의거였다. <73~74쪽>


『의열단, 항일의 불꽃』
김삼웅 지음 | 두레 펴냄│352쪽│1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