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암 김성숙 평전 52회] "아직은 논공행상할 때가 아니다"
▲ 운암 두군혜 가족사진. 김성숙의 중국가족과 동지들. 가운데 김성숙과 두군혜 부부가 서있고, 오른쪽이 박건웅이다. 운암 두군혜 가족사진. 김성숙의 중국가족과 동지들. 가운데 김성숙과 두군혜 부부가 서있고, 오른쪽이 박건웅이다.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1964년 6월 1일
5ㆍ16부터 금일까지 꼭 16일간은 천식이 극도로 발작하여 그야말로 사선에서 헤매고 있었으므로 일기도 쓸 수 없었다. 4, 5일전 다행히 아미노피린 혈관주사를 맞고 특효를 보게 되어 지금은 천식이 떨어진 모양인데 수개월간 병고로 시달린 관계로 전신이 모두 아파서 거동을 할 수 없을 정도다. 작일부터는 음식 맛도 나고 정신도 비교적 좋아져서 정원에서 거닐어보기도 했다.
나는 이번 병으로 꼭 죽게 되는 줄 알았다. 아미노피린 주사를 맞게 된 것은 부전(富田) 모의 주장으로 된 것인데 부전 모는 주사로 자기가 특효를 봤다는 것이다. 여하간 죽지 않고 살아났으니 또 무슨 산 보람을 해야 할 것인데 지금의 건강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아직도 수주일 간 휴양을 하고 건강을 회복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처는 이상백을 방문, 명수언니가 와서 환담하였다. 석양부터 비가 오기 시작. 청운ㆍ천연이가 쌀 배급을 타 왔다. (주석 11)
1964년 6월 26일 금요일
따뜻하고 맑음.
오늘은 김구선생 서거 기념일이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기념식을 효창공원묘소에서 거행한다고 하는데 나는 병으로 참석할 수 없다. 백범선생의 서거일 광경은 생각하면 과연 감개무량한 바가 있다.
안두희라는 자에게 권총사격을 받고 즉사한 지 2시간 내에 나는 김재기 집에 달려가 보았는데 그 흉한 참상이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흥분한 나머지 술이 대취하여 그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처와 대싸움까지 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나는 금일까지 10여년간 계속해서 반이박사, 반한민당투쟁을 하여오며 기막히는 고난을 겪고 있다. 안두희는 지금도 버젓이 대한민국의 양선(良善)한 국민으로 인정받고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은 불의의 사회가 오래 존속한다면 천의가 없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작야 영계백숙을 먹고 과연 정신이 상쾌해졌다. 강변에 산보하였다. 처는 외출하였다가 만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공환(空還)하였다. (주석 12)
1964년 12월 23일 수요일
쌀쌀하고 맑음.
금일도 일기가 매우 온화하다. 4, 5일 이래로 봄날씨가 계속된다. 오반 후 시내로 들어가 당사에 들려 여러 동지들과 만나 환담하였다. 화암이 미운을 만나 의견을 교환했는데 미운이 당발기문제에 대해서 매우 적극적이라고 한다. 반가운 소식이다.
석양에 홍승만 씨를 방문, 돈 1000원을 얻어 가지고 그 길로 귀가하였다.
항산의 전언에 의하면 나와 소해 선생은 독립유공자 표창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무가무불가(無可無不可)한 소식이다. 표창을 해도 좋고 안 해도 무방한 일이기 때문이다. 첫째 나는 독립무공자(獨立無功者)임을 자인하는 사람이므로 표창하지 않는다고 해서 조금도 불평할 리 없는 것이고 또 현정권이 나를 유공자라고 해서 표창한다는 것을 굳이 거부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일관한 주장은 우리나라가 아직도 독립이 되지 못하고 외국세력 하에서 전 민족이 신음하고 있으므로 독립운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은 논공행상할 때가 아니다. (주석 13)
주석
11> 앞의 책, 127쪽.
12> 앞의 책, 142쪽.
13> 앞의 책, 2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