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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신민당 지도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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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9-21 17:40 조회10,88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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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 김성숙 평전 53회] 오로지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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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 김성숙 선생 젊은 시절 김성숙 선생의 사진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김성숙은 '일기'에도 썼듯이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생애 처음으로 '내집'을 마련하여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었다.

집이라야 성동구 구이동의 통사당 재정부장 구익균의 집마당 한 모퉁이에 건평 11평의 방 두 칸짜리였다. 동지ㆍ후배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준 돈으로 지은 것이다.


 '비나 피하라'는 뜻의 피우정(避雨亭)이라는 현판이 집 앞문 위에 걸렸다.

19살 때 출가한 이래 중국대륙을 풍찬노숙하기 20여 년, 환국하여 여관으로 셋방으로 혹은 감옥으로 전전한 지 20여 년 만에, 그것도 동지ㆍ후배들의 푼돈으로 장만한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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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우정 약도 피우정 약도  ⓒ (사)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


거처는 어렵살이 마련되었는데 육신에 병고가 깊어졌다. 기침과 가래가 심하고 천식으로 이어졌다. 


"오늘도 집에 쌀이 떨어지고 보니 좌이대사(坐而待死) -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다는 필자) 형편이어서 천식기가 있는 것을 불고하고 외출하였다."(3월 21일자 일기) 


"작야에 천식으로 잠 한잠 못자고 쪼그리고 앉아서 밤을 꼬박 세웠다. 야 10시 반부터 본격적으로 발작하기 시작해서 12시 반까지 약 2시간 동안은 사경에 빠져서 고통하는 것이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금일 하루를 호흡이 곤란하여 꼼짝 행동하지 못하고 쪼그리고 앉아서 견디자니 참으로 지독한 병이다."(3월 22일자 일기) 


지독한 병고를 정신력으로 버텼다. 박정희 정권이 독립운동가들의 서훈에서도 빼놓자 주변에서 본인의 '서훈신청'을 권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정부에서 공적을 기려 서훈을 하면 몰라도 일본군 장교 출신의 정권에 서훈신청을 하지 않겠다는 결기였다. 얼어 죽어도 곁불을 쬐지 않겠다는 선비정신이었다.

고독한 독립운동가 출신의 병고 따위와는 아랑곳없이 박정희 정권은 날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폭력성이 더해갔다.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이어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증파하고, 주한미군에 대한 재판권을 사실상 포기한 한미행정협정을 조인하기에 이르렀다.(67. 2. 9. 발효)

신한당은 제6대 대통령선거와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제1야당 민중당과 통합하여 신민당으로 재창당하였다. 보수야당의 통합이었다. 고대총장 출신 유진오를 총재, 윤보선을 대통령후보로 뽑았다. 이에 앞서 3월 9일 민주사회주의의 이념 아래 정치ㆍ경제ㆍ사회의 현대화를 당헌으로 하는 혁신정당 대중당이 출범했지만, 김성숙은 신민당에 참여하였다.

박정희 정권을 퇴출시키고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보수통합 야당인 신민당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신한당 참여 때처럼 보수야당의 체질개선에도 도움이 될 것이란 뜻도 담겼다. 신민당의 운영위원에 이어 지도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신민당 당헌은 최고의결기관이 정무위원회이고 지도위원회는 일종의 자문역할이었다. 자문위원은 원로급 인사들이 맡았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제1야당의 지도위원을 역임한 이는 그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신민당은 윤보선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박정희에게 패배하고, 6월 8일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참패하였다. 박정희는 장기집권의 포석으로 6ㆍ8선거를 관권을 총동원하여 부정선거로 이끌었다. 3ㆍ15선거가 무색할 정도의 부정선거였다. 3선개헌을 강행하려면 원내 3분의 2 의석이 요구되었고, 이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선거부정을 감행했다.

선거결과 공화당 129석, 신민당 45석, 대중당 1석으로, 공화당은 3선개헌에 필요한 의석을 확보했다.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학생들이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나서자 정부는 전국 28개 대학과 219개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용납할 수 없는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이를 규탄하는 학생들을 비교육적인 방법으로 탄압했다.

모든 것이 박정희의 1인 장기집권을 위해 저질러지는 불법이고 후유증이었다. 이승만이 걸었던 방식 그대로였다. 4월혁명이 있은 지 15여 년 만에 다시 반헌정 행태가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다. 김성숙은 불편한 육신을 끌어안고 통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혁신계 동지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아가면서 보수야당에 참여했던 것은, 오로지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죽기 전에 남북대화의 물꼬라도 터 보려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다.

이런 소망이 사라지면서 육신은 더욱 쇄약해졌다. 천식이 고질화되고 합병증세를 불러왔다.

"유족들의 말에 의하면 지난날 근로인민당 재건기도 혐의라는 허위 날조된 사실로 불법구금되어 징역 12년 구형을 받았을 때부터 울화가 치밀어 홧병으로 천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때 이래로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며 고생하다가 말년에는 심한 기침으로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극심한 고통을 겪었으나 돈이 없어 약을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주석 1)

주석
1> 목우, 앞의 책, 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