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옥 소유주 친일 행적 언급 전무…객관적 서술 위한 보완 필요성 제기
▲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가옥들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있지만 이 중 일부는 친일파 또는 친일 의혹에 휩싸인 인물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진정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선 문화재적 가치 외에도 중요하지만 가옥이 지닌 내력 또한 제대로 알려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사진은 서울 종로구 계동 소재 김성수 가옥 ⓒ스카이데일리
[특별취재팀=박선옥·김진강 부장, 이한빛·배태용 기자]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역사적 가치를 지닌 유물에 지정되는 근대문화유산 중 친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가옥이 포함돼 논란이 일고 있다. 대부분 지자체가 매입해 관리 중인 이들 가옥에는 친일과 관련된 내용이나 소개가 누락돼 있기 때문이다.
항일단체들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의 행적을 재조명하는 활동에 발맞춰 친일파 관련 근대문화유산에 이들의 친일행보를 언급해 국민들이 사실 관계를 명확하게 알고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 한복판에 남겨진 친일파 흔적 서울…후손들도 재계 호령하며 떵떵
현재 서울 내에 가옥이 보존된 이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주로 정치인 또는 문화예술인이었다. 해방 이후 정치인으로 변신한 김성수와 장면은 친일 단체에 가입해 담화 및 연설을 통해 전쟁 수행에 협력한 것이 밝혀지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랐다. 특히 김성수는 아들인 김상흠 전 국회의원이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일행위에 참여해 대조된 모습을 보였다.
▲ [그래픽=박희라 기자] ⓒ스카이데일리
이광수, 서정주, 이상범 등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특기를 앞세워 친일 성향의 예술단체에 가입해 일제에 대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전쟁을 미화하는 작품을 발표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광수와 홍난파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된 이후 옥중에서 전향하며 친일행위에 가담했다. 다만 홍난파와 윤극영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있지만 친일행위가 자발적인지 강제적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주장이 엇갈린다.
해방 이후에도 이들은 각자 영역에서 위세를 떨쳤다. 김성수는 정계는 물론 재계, 언론계, 교육계 등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해방 직후부터는 정치 활동에 집중하며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제2대 부통령을 지내며 이승만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다 1955년 사망했다. 장면 역시 주미대사를 거쳐 제3대 부통령, 제7대 국무총리를 역임하는 등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친일파의 자녀들 역시 승승장구 했다. 김성수와 함께 친일행위에 가담한 동생 김연수는 삼양사의 사세를 키워 지금의 삼양그룹으로 만들었다. 현재 아들과 손자가 경영을 이끌고 있다. 김성수가 만든 경성방직 역시 경방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김성수의 제부인 김용완과 그의 후손들이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장면의 자녀들은 아버지와 달리 교육계, 종교계 등에서 활동 중이며 서정주와 이상범의 자녀들도 작가, 화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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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박희라 기자] ⓒ스카이데일리
현재 보존된 친일파 혹은 친일행위자 가옥은 건축,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등록문화재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관리 중이다. 문화재청에서 선정한 등록문화재로는 △이광수 별장 터(제87호) △홍난파 가옥(제90호) △이상범 가옥과 화실(제171호) △장면 가옥(제357호) 등 4곳이 있다.
서울시가 지정한 서울미래유산에는 △김성수 가옥 △서정주 가옥 △윤극영 가옥 등 3채가 존재한다. 반계 윤웅렬 별장도 서울시 민속문화재 12호로 지정돼 관리 중이다. 이 중 1970년대 지어진 서정주 가옥을 제외하면 모두 일제강점기 이전에 지어진 건물들이다.
문화재로 선정된 가옥 대부분은 지자체에서 매입해 관람시설로 개방하고 있다. 단 김성수 가옥은 삼양그룹 산하 공익재단인 인촌기념회가 소유 중이며 반계 윤웅렬 별장은 이건그룹 박영주 회장 부부가 2006년 매입해 현재까지 가지고 있다.
주목되는 사실은 일반 국민들에게 공개된 이들 가옥의 친일과 관련된 내력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친일파 가옥 관람시설에는 과거 살던 인물의 친일 행적을 언급하는 내용이 거의 담겨지지 않았다.
▲ 등록문화재, 서울미래유산 등으로 지정된 친일파 가옥의 안내판을 살펴본 결과, 이들의 친일 행적에 대한 언급은 전무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 위쪽부터 김성수 가옥, 이상범 가옥 및 화실, 서정주 가옥 안내판 ⓒ스카이데일리
가옥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이 가옥에 살던 인물이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에 대한 공과 이 문화재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소개하는 것이 전부였다. 가옥 내 전시시설에도 이들의 과거 활동이나 업적을 소개하면서 평소 생활을 재현하는 것에 그쳤다.
심지어 김성수 가옥의 경우 안내판에 김성수가 민족 계몽운동에 주력하고 이 집에서 2.8 독립선언 준비 및 3.1운동의 초기 준비단계를 위한 밀회의 장소였다고 언급돼 있어 자칫 김성수가 단순히 독립운동가로 비춰질 가능성도 역력해 보였다.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은 해당 인물의 친일 행적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관광객 김희연 씨는 “따로 설명이 없어서 그냥 김성수 관련 전시시설인 줄 알았는데 뒤늦게 친일을 한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관광객 오영준 씨는 “안내판에는 이 사람의 업적만 담겨있다 보니 이 사람이 친일을 했는지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에 전혀 알 수 없었다”며 “아무리 (가옥이)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해도 (관련 인물의) 잘못한 부분에 대한 언급 정도는 해야 한다고 본다”고 지적했다.
▲ 관람을 허용한 친일파 가옥 내부의 전시 시설에서는 대부분 해당 인물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었다. 다만 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에는 홍난파 선생이 친일 가요를 작곡했다는 사실(빨간 테두리)이 언급돼 있었다. ⓒ스카이데일리
항일단체들은 가옥이 지닌 건축사적·역사적 가치가 중요하지만 과거 소유주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고 공감했다. 친일행위자들의 공적 뿐 아니라 어두운 면을 비춤으로써 해당 문화재를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의 일환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용우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팀장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해당 건물에 대한 보존 필요성이 강조돼야지 친일파의 행위가 호도되는 목적으로 사용돼선 안된다”며 “근대유산에 관련된 부분을 보존하려면 올바른 정보를 함께 제공해야 하는데 친일행위자를 거론하면서 제대로 정보를 표출되지 않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친일파 가옥을 관리·운영하는 지자체에서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지금이라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며 “건축물에 대한 가치는 분명하게 조명하 돼 과거 소유주의 내력에 대해서도 명명백백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 시민들과 항일단체 관계자들은 친일행위자들의 가옥을 통해 그들의 공만을 조명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친일 행위에 대해서도 공정하게 기술해 ‘다크투어리즘’의 일환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성수 가옥, 홍난파 가옥, 서정주 가옥, 이상범 가옥 및 화실 ⓒ스카이데일리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공과 과를 드러내는 것이 용기인데 이를 알리지 않는 것은 곧 부작위의 은폐다”며 “안내판이나 유인물 비치 등 최소한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전북 고창 서정주 시문학관처럼 친일 작품 수십 점을 전시해 과를 드러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친일행위자들에 공에 치중된 문화재 관리에 대한 지적이 이어지자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과를 명시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안형순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장은 “이 문제에 대해 여러 번 논의를 했는데 건축학적·역사적 흔적을 남겨 보존하고 역사적 교훈을 주는 매개체로 활용하자는 의견으로 모아졌다”며 “이를 위해 문화재 안내판 정비사업을 통해 인물에 대한 과를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방향을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도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친일파 가옥에 대해 재검토 방침을 밝혔다. 손광언 서울시 미래유산팀장은 “김성수 가옥의 경우 지정 취소 요청이 있었는데 심의를 전담하는 기구가 따로 있어 별도의 논의가 필요했다”며 “오는 5~6월 중 해당 안건에 대해 논의가 있을 예정이라 이 부분을 재검토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이한빛 기자 / 행동이 빠른 신문 ⓒ스카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