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일운동 거점’ 둘러보니…
1920년대 임정 개편 논의 때
베이징선 주로 무장투쟁 주장
상하이나 만주 독립운동 비해
규모 열세탓 그동안 덜 알려져
이회영이 거주했던 두번째집
김창숙·신채호 등 함께 거주
심훈도 한때 머물며 시 남겨
이육사 갇혔던 지하감옥 건물
지금은 쓰레기·잡초만 무성
안창호 베이징YMCA서 강연
청년들에 ‘실력양성론’ 강조
‘아나키즘’ 김원봉의 의열단도
1920년대 초반 이곳에 거점
조소앙·이윤재 발자취도 남아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지난 16일 중국 베이징(北京) 시내 유명 쇼핑가인 왕푸징(王府井)에서 북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뒷골목 둥창후퉁(東廠胡同). ‘광야’로 유명한 일제강점기 대표적 저항 시인 육사(陸史) 이원록(1904∼1944)이 생의 마지막을 보낸 흔적을 찾아 나섰다. 정확하지 않은 도보 내비게이션 때문에 몇 번을 헤맨 끝에 둥창후통 28호 입구를 찾아냈다.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대문을 들어섰다.
좁은 골목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일본 헌병대가 1926년부터 지하 감옥으로 사용한 2층짜리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주변에는 쓰레기와 잡초가 무성했다. 대낮이었지만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듯한 이 낡은 건물의 1층 문은 열려 있었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건물 지하에서 이육사는 1944년 1월 16일 모진 고문 끝에 사망했다. 필생의 꿈이었던 조국 광복을 1년여 남기고 이국땅에서 독립 투쟁을 벌이다 죽은 그를 생각하니 쉽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시인이자 기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그는 일제 요인 암살 등을 위해 조직한 의열단의 단원이었고, 난징(南京)에서 설립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군사교육도 받았다. 그는 충칭(重慶) 임시정부와 연계된 국내 무기 반입 임무 때문에 1943년 가을 경성에서 체포된 뒤 베이징으로 압송돼 이곳에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추정된다. 초인을 기다리던 그의 죽음으로 인해 ‘광야’는 유고작이 됐다. 둥창후퉁에서 걸어서 5분여 거리에 있는 베이다훙러우(北大紅樓). 1900년대 초반 베이징대 문과대학 건물로 사용됐는데, 이육사는 1925년쯤 이곳에서 청강생으로 수학하기도 했다. 베이다훙러우는 민족사학의 거두 단재(丹齋) 신채호(1880∼1936) 선생이 베이징 생활 내내 사서 연구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그동안 독립운동 역사에서 변방으로 취급됐던 베이징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베이징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의 주류인 외교를 통한 독립 노선에 반대한 우당(友堂) 이회영(1867∼1932), 심산(心山) 김창숙(1879∼1962), 신채호 선생 등의 독립운동 근거지였다. 이들은 빼앗긴 나라를 우리 자신의 힘으로 찾자는 무장투쟁론을 내세웠다. 현재 베이징동물원 내에 있는 건물 창관러우(暢觀樓)에서는 1921년 4월부터 6월까지 임시정부를 군정부로 전환해 무장투쟁을 본격화하기 위한 ‘군사통일회의’가 열렸다. 창관러우에 가보니 1층은 중국 유물 전시관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출입이 금지됐다. 입구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원래 사무실이 있었는데 1년 전쯤 이사를 가고 현재는 비어 있다”고 답했다.
당시 국내와 만주, 해외에서 온 독립운동가들은 이 회의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개편 문제를 논의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했다. 여러 곳에서 국민대표회의 소집 목소리가 커지면서 1923년 1월 각 지역과 단체를 대표하는 130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상하이에 모여 독립운동 사상 가장 큰 규모인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다.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이 제기한 한국 통치를 미국에 위탁하자는 ‘위임 통치론’과 ‘외교 독립론’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거셌다.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를 해체해 군정부로 가자는 창조파와 임정을 유지하면서 군정부 요소를 도입하자는 개조파, 현행 유지파로 나뉘어 4개월간 치열한 논쟁을 벌였으나 합의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1920년대 베이징은 ‘북경 3걸’로 불리는 이회영, 김창숙, 신채호 선생을 주축으로 안창호, 조소앙, 이윤재, 김원봉, 류자명, 김성숙, 심훈, 이육사, 김산 등의 독립투사들이 머물거나 거쳐 갔다.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인 이회영은 1910년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6명의 형제와 일가족 모두 가산을 처분해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나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1911년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5월쯤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이후 1925년 11월 말까지 6년여 동안 베이징 내에서 6곳을 옮겨 다녔다.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아낌없이 숙식을 제공한 그의 집은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아 ‘북경의 임시정부’로 불렸다.
베이징의 뒷골목 중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난뤄구샹(南라鼓巷)’ 근처에 있는 허우구러우위안후퉁(後鼓樓苑胡同). 이곳 골목길 어딘가에 있었던 이회영의 두 번째 집에는 1920년 상하이에서 올라온 이동녕(1869∼1940, 임시정부 주석·국무령·국무총리 역임) 선생과 동생들인 이시영(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호영 등이 거주했다. 김창숙·신채호는 이회영의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은 1919년 겨울 이곳에서 거주하며 만터우(饅頭)를 저녁으로 먹고 인근 구러우(鼓樓)의 종소리를 들으며 잠을 뒤척이던 겨울밤을 ‘고루의 삼경’이란 시로 남겨 놓았다. 무정부주의(아나키즘)를 수용한 이회영은 1920년부터 의열단을 후원하고 1931년에는 비밀행동조직 ‘흑색공포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듬해 상하이에서 다롄(大連)으로 가던 중 체포돼 11월 17일 다롄경찰서에서 고문 끝에 옥사했다.
신채호는 1915년부터 1928년까지 13년 동안 베이징에 거주하며 31곳에 자취를 남겼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곳이 1921년 1월부터 다음 해 12월까지 거주한 차오더우후퉁(炒豆胡同)으로, 이곳에서 중국어 잡지 ‘천고(天鼓)’를 발행했다. 이 잡지는 한중공동전선으로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야 한다는 주장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즉, ‘독립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라는 신채호의 사상이 여기에 집대성돼 있다. 이 잡지는 모두 3호까지 발행됐는데, 베이징대 도서관에 현재 1∼3호가 남아 보관돼 있다. 조선사 연구를 통해 민족사관을 정립한 신채호는 베이다훙러우와 자금성(故宮) 내 문연각에서 사서를 집중 연구했다.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창조파로 임정 해체를 주장했고,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했다. 혼자 지내던 신채호는 이회영 부인의 중매로 3·1운동 때 간호사들의 독립단체인 ‘간우회’를 주도한 뒤 베이징으로 망명한 박자혜 여사를 만났다. 15살의 나이를 뛰어넘어 재혼하는 ‘러브스토리’를 만들었다.
북경 3걸 중 가장 짧은 1920∼1923년 베이징에 거주한 유림의 정신적 지주 김창숙 선생은 제1차 유림단 사건으로 체포된 뒤 출옥 후 베이징으로 넘어왔다. 그는 3·1운동 후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 대표들이 서명한 유림단 진정서를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또 서로군정서를 조직해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과 교섭해 독립운동기금을 원조받았다. 베이징에 있는 동안에는 신채호의 천고 발행인으로 참여했다. 김창숙은 1925년 임정 의정원 부의장으로 당선된 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체포돼 본국으로 압송됐다. 14년형을 받은 그는 대전형무소에서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초대 성균관대 학장(총장)을 지냈으며, 1962년 사망했을 때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와 김수환 추기경조차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정도로 국민적 신망을 한몸에 받은 꼿꼿한 독립투사의 전형이었다.
베이징에서는 도산(島山) 안창호(1878∼1938) 선생과 손정도 목사, 고려기독교청년회 등 기독계 계통의 독립운동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교육을 통한 민족혁신을 주창한 안창호는 1922년 지금은 중화성경회구지(中華聖經會舊址)라는 이름으로 보존된 베이징기독교청년회(YMCA) 건물에서 강연했다. 이 연설을 들은 고려기독교청년회 회원들이 대거 흥사단에 가입했다. 베이징에서도 안창호는 외곽에 해전(海淀)농장을 김승만, 안정근, 의사 이자해 등과 공동 경영하며 이상촌 건설을 시도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유폐된 고종과 함께 있었던 손정도 목사가 1911년 전도사로 들어와 처음으로 조선어 설교를 했던 ‘북경기독교회 충원먼탕(崇文門堂)’ 교회는 지금도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손정도는 고종이 1919년 6월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의친왕을 파견해 독립 의지를 알리려고 했을 때 일행이 안전하게 파리에 갈 수 있도록 2월에 미리 파견돼 충원먼탕 인근 퉁런이위안(同仁醫院)에 머물렀다. 하지만 고종의 급서로 이 계획은 실패했다.
영화 ‘밀정’으로 유명해진 아나키즘 계열의 의열단도 1920년대 초반에 베이징에 본부를 두고 의열 투쟁을 전개했다. 김원봉, 류자명, 김성숙 등이 의열단을 주도했고, 신채호도 관여했다. 미국 작가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도 베이징 셰허이위안(協和醫院)에서 한때 의학을 공부했다. 또 상하이 임정에서 주로 활동한 조소앙(1887∼1958) 선생은 1921년 유럽과 러시아 순방 외교를 마친 뒤 베이징에 잠시 들러 이회영, 신채호 등에게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독재의 실상을 알려 공산주의에 대한 이들의 기대를 꺾게 했다. 한글학자 이윤재(1888∼1943) 선생은 1921년 베이징으로 망명해 신채호의 영향으로 베이징대 사학과에 입학해 수학했다.
이처럼 많은 독립운동가가 베이징을 근거로 활동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베이징의 독립운동은 국내와 상하이 임시정부, 만주·연해주 무장투쟁에 비해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베이징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다룬 제대로 된 책 한 권도 없이 여러 논문에 산재해 있을 뿐이다. 이 지역에서 활동한 인물들이 주류가 아닌 데다 독립운동단체의 규모나 영향력 면에서도 상하이나 다른 지역에 비해 열세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무장독립투쟁을 주축으로 한 베이징 지역 독립운동 연구와 유적지 발굴이 제대로 이뤄져야 우리나라 일제하 독립운동사의 그림이 온전하게 완성된다고 주장한다. 베이징 지역의 시민연구단체인 ‘재중화북항일역사기념사업회’가 수년 전부터 이러한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지역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 직접 답사하고 기록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최근 ‘북경독립운동가 루트’ 지도가 제작됐다. 지금까지 ‘단재 루트’ 31곳을 포함해 276명의 독립운동가가 관련된 105곳의 유적지를 찾아내 지도에 표시하고 주석을 달았다. 여기에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통해 베이징에 거주했거나 다녀간 행적이 확인된 독립운동가들이 망라돼 있다. 앞으로 추가 확인을 통해 모두 500여 명(이 중 400여 명은 건국훈장을 받음)에 달하는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기록할 계획이다. 이 단체의 홍성림 회장은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고증을 통해 확인한 뒤 중국 정부의 협조를 얻어 유적지에 이들의 독립활동을 기념하는 동판을 부착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이 단체는 베이징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진과 사료, 유물 등을 모아 ‘북경독립운동기념관’을 설립하는 것을 중장기적 목표로 하고 있다. 기념관 부지는 베이징동물원 내 군사통일회의가 열린 창관러우 2층의 빈 장소를 점찍어 뒀다.
글·사진 = 김충남 특파원 utopian21@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