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보면 우리가 김원봉을 쫓아낸 것... 죄책감 느껴야”
“조선의열단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 국가행사로 진행해 의미깊게 치르고 싶다”
“‘오늘날의 독립군’ 발굴 야무지게 준비 중”
국가보훈처의 자문기구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가 지난 2월 약산 김원봉 조선의열단장에 대한 서훈을 권고한 사실로 갑론을박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김원웅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장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김원봉을 쫓아낸 것”이라며 올해 광복절에는 김원봉에게 훈장을 주고싶다는 소망을 드러냈다.
김원웅 회장은 지난 18일 <폴리뉴스> 김능구 대표와 가진 ‘정국진단’ 인터뷰에서 신탁통치에 관해 “외세의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것은 너무 불확실한 점이 많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김 회장은 ‘착한 동맹’은 없다며 한미동맹에 관해서도 “한미동맹의 강화는 대미종속의 강화”라고 강조했다.
“국제사회에 한국은 ‘친미’로 비춰진다"
김 회장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으로 재직할 당시 반기문 외교부장관의 유엔사무총장 선거운동을 도왔던 일화를 소개했다.
프랑스가 “반기문은 미국이 침략전쟁을 할 때마다 용병을 보내는 남한의 외교부 장관이다”라며 반대의 뜻을 보였을 때, 김 회장이 나서 남북관계로 인한 미국과의 갈등, 전시작전권 회수 등의 이슈를 직접 알리며 남한이 ‘친미’가 아님을 알렸다고 한다. 이에 반기문 장관이 유엔총장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노무현 정부 당시 평양에서 만난 북한 사람과의 대화도 전했다. 김 회장은 그에게 “남한은 6.25 당시 도와줘서 감사하다는 이유로 맥아더 장군 동상을 세웠는데, 북한은 팽덕회(펑더화이) 동상을 안 세우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북한 사람은 “고맙긴 하지만 그것은 중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며, 팽덕회는 중국의 애국자일지언정 북한의 애국자는 아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삼국시대 때 당나라가 신라를 도와 백제를 멸했는데, 신라가 소정방 장군 동상을 금강 앞에 세웠다고 한다면 자랑스러운 일인가”라고 반문했다고 전했다.
조선의열단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조직
김 회장은 김원봉과 조선의열단의 항일운동에 대해 “해외 활동뿐만 아니라 국내 진입을 시도했다”며 “국내진입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후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으로 체제를 개편한 조선의열단이 독립운동에 큰 비중을 가지고 있음을 역설했다.
또한 “조선의열단은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조직”이라며, “일제 당시 김원봉의 현상금은 100만원으로 김구의 현상금 60만원보다 높았다”고도 전했다.
김원봉은 우리나라가 승전국가로 국제적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고 봤고, 그것을 임시정부로 정했다. 임시정부에 들어가서는 광복군 부사령관을 맡았다. 해방 이후엔 남한으로 왔는데, 친일파들이 횡행하면서 고초를 받았다.
김 회장은 김원봉이 “일본 밑에서도 이런 수모를 겪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해방된 조국에서 이럴 수 있느냐”며 통곡했다는 일화를 언급하며 “어떻게 보면 우리가 김원봉을 쫓아낸 것”이라며 씁쓸해했다. 또한 “이 부분에 죄책감을 느껴야하는데 북으로 갔다고 서훈을 안준다는 것은 친일파의 논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조선의열단원들은 근본적으로 좌파가 아니고 순수한 민족주의자들”이라고 강조했다. 의열단 강령을 만든 단재 신채호의 경우도 자신을 민족주의자로 칭하며 좌파 진영에 합류하지 않았는데, 이승만과의 갈등 이후에 ‘빨갱이’로 몰린 것이라고 말했다.
1942년 당시 중국 태항산에서 일본 관동군에게 포위당한 중국 팔로군의 퇴로를 뚫어준 것도, 만주에서 앞장서 싸워 모택동(마오쩌둥)이 장개석(장제스)를 이길 수 있는 기회를 준 것도 조선의용군과 의용대였다.
이에 대해 김 회장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 때문에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남한-미국과는 다르게 수평적”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의열단 창립 100주년, ‘오늘날의 독립군’ 발굴할 예정
올해는 조선의열단 창립 100주년으로, 기념사업회 차원의 행사가 아니라 국가행사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해 청와대 등 관련 부서와 상의하고 있다고 한다. 김 회장은 여러 기념사업회 단체를 아울러서 기념행사를 의미깊게 치르고 싶다고 말했다.
또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는 ‘오늘날의 독립군’, ‘오늘날의 의열단’을 발굴하고 양성하는 사업을 준비 중이다. 한국 영화사업의 공간을 유지하는 ‘스크린쿼터제’를 뒷받침한 영화배우 안성기와 정지영 감독같은 ‘문화독립군’이나, 윤동주 기념관을 만들고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례를 만든 김영종 종로구청장 등 남이 잘 모르지만 의미있는 활동을 한 사람을 챙기겠다는 취지다.
이를 통해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는 의열단 정신을 어떻게 다시 우리 시대에 승계할 것인가를 고민해 볼 것이라고 밝혔다.
김 회장은 최근 영화 ‘암살’을 계기로 김원봉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있으며, 5월에는 MBC에서 김원봉 단장이 주인공인 드라마 ‘이몽’이 방송되는 것에 대해서도 반가움을 보였다.
이광호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고 알려져있는 김상옥 조선의열단원이 일본 군경 천여명과 총격전을 벌이다 남은 한발로 자결한 일화 등 영화같은 이야기를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보려고 계획 중”이라고 넌지시 전하기도 했다.
다음은 김원웅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장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신탁통치에 대해서 ‘찬탁’, ‘반탁’, 이 부분이 상당히 혼란스럽다.
어쨌든 외세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것은 너무 불확실한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나는 ‘좋은 동맹’, ‘나쁜 동맹’이 없다고 본다. 다만 ‘착한 동맹’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외교적으로 봤을 때 미국은 사실 대한민국을 동맹국가로 생각 안한다. 졸개로 생각하지. 우리나라가 쿠바와 수교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쿠바와 수교를 하자고 했더니 정부에서 펄펄 뛰더라. 미국이 하지 말라고 했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되물었다. “우리나라와 미국이 가까운가, 일본과 미국이 가까운가? 영국과 호주는?” 그들은 우리나라보다 미국과 더 가까운 나라인데도 모두 쿠바와 수교를 했다. 쿠바와 수교를 하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과 우리나라뿐이다.
한미동맹, 한미일 동맹이라는 말은 거짓말에 가깝다. 한미동맹의 강화가 아니라 대미종속의 강화일 뿐이다.
예전에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으로서 당시 외교부장관이었던 반기문의 유엔사무총장의 선거운동을 도와줄 때, 프랑스가 반대했다고 한다. 프랑스는 UN 상임이사국인데, 5개 상임이사국 중 하나라도 반대하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프랑스는 “이라크 전쟁같이 미국이 자꾸 침략전쟁을 하는데 남한은 미국의 침략 전쟁 때마다 용병을 보내는 나라다. 그런 나라의 외교부장관이 어떻게 평화를 지키는 유엔사무총장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프랑스를 가서 국회 외교위원장을 만났다. 똑같은 이야기를 해서 “당신 말이 맞다”고 했다. 그 사람이 놀랬다. “그런데 당신은 낡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옛날엔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했다. “지금 남북관계 때문에 우리와 미국 사이에 갈등이 있는걸 알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하더라.
내가 “우리는 한반도 평화 때문에 미국과 갈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67만 군대가 있는데 전시작전권이 미국에 있다. 진정한 자유국가가 되기 위해 미국에 전시작전권 회수를 요구했다. 당연한 것을 하려고 하는데 한국의 친미주의자들이 노무현대통령을 ‘김일성주의자’라고 욕하더라”고 말했더니 이해를 못하더라. 당시 조선일보에 나왔던 전시작전권 회수 반대 사설을 번역해서 보내줬다. 그랬더니 문제가 해결됐다. 국제사회에 우리나라가 그렇게 비춰진다.
사실 역사상 어떤 강대국이든 패권주의가 없는 나라가 없다. 미국도 그 중 하나다. 힘이 곧 정의인 것이다.
노무현 정부 당시 평양을 다녀온 적이 있다. 북한 사람과 만날 기회가 있어서 물어봤다. “남한은 6.25 당시 도와줘서 고맙다고 맥아더 장군 동상도 세우는데, 북한은 팽덕회(펑더화이) 동상 등 같은 걸 안 세우는가?”
북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도와준 것이 고맙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게 온전히 북한만을 위해 도와준 것이 아니고, 중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니까 도와준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중국의 애국자일지언정 북한의 애국자는 아니다”라고 했다.
또 “삼국시대 때 당나라가 신라를 도와 나·당 연합군을 만들어서 백제를 멸하는데 앞장섰다. 그렇다고 신라가 소정방 동상을 금강 앞에 세웠다고 한다면, 그것이 자랑스러운 일인가?”하고 되물었다.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르구나, 하고 느꼈다.
-사실 김원봉의 이름이 그동안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아마 한국전쟁 시기에 북으로 가서 그랬던 것 같다. 김원봉의 항일운동은 어떻게 전개됐는가?
여러 가지 항일운동의 방향이 있었다. 안창호 등은 교육의 측면, 임시정부는 외교적인 측면. 조선의열단은 무장투쟁을 해야한다고 봤다. 조선의열단은 단순히 해외에서 무장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국내로 진입을 했다. 국내진입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다는 것이다. 김상옥 의사라던지, 박열이라던지, 그런 분들이 조선의열단이었다. 조선의열단이 나중에 조선의용군이 되고 조선의용대가 되면서 해방까지 이어졌다.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조직이 조선의열단이다. 일제 당시 김구의 현상금이 60만원, 김원봉이 100만원이었다.
김원봉은 일제가 패망하면 우리가 승전국가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런 국제적인 대접을 받기 위해서는 구심점이 있어야한다고 봤다. 그 구심점을 임시정부로 한 것이다.
김원봉은 임시정부에 들어가서 광복군 부사령관을 맡았다. 조선의열단원들은 근본적으로 좌파는 아니고 순수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단재 신채호가 의열단 강령을 만들었다. 신채호의 경우도 좌파로 오라는 요청이 있었을 때 자신은 민족주의자라서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동안 특히 김원봉이 북으로 가고, 신채호가 이승만과 틀어져있지 않았는가. 그래서 더 폄훼를 받았다. 이승만이 전에 미국에 위임통치청원을 보낸 사실이 드러나고 탄핵됐을 때, 신채호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는데 이승만은 찾지도 못한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라고 화낸 적이 있다. 그래서 해방 이후에 이승만 부하들이 신채호를 인정하지 않고 빨갱이로 몰았다.
김원봉이 해방 이후 남한으로 오지 않았나. 남한에 있었는데, (남한이) 친일파 천국이 됐다. 일제 밑에서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노덕술 등이 온전했고, 역시 친일 뿌리였던 경찰책임자 장택상 등도 있었다. 그들이 김원봉을 데리고 가서 며칠간 취조를 했다. 그때 뺨을 때리고 무안을 주기도 했다.
김원봉은 “일본 밑에서도 이런 수모를 겪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해방된 조국에서 이렇게 수모를 당하느냐”며 통곡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김원봉을 쫓아낸거다. 여기에 죄책감을 느껴야지 북한으로 갔으니까 (서훈을) 안준다, 이건 말이 안되는 친일파의 논리라고 생각한다.
금년 광복절에는 김원봉에게 훈장을 주고 싶은데, 우리나라가 김원봉에게 훈장을 줄 자격이 있는 나라인지 걱정이 된다.
올해가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이기도 하지만, 11월 10일이면 조선의열단 창립 100주년이 된다. 기념사업회 차원의 행사가 아니라 국가행사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문제를 청와대 등 관련부서와 상의를 하고 있다.
해외에서 세미나도 했는데, 중국과의 관계가 크다. 1942년 당시, 중국 태항산에서 중국 공산당 본부가 일본 관동군 삼만명에게 포위당한 적이 있다. 공산당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조선의열단 몇십명이 퇴로를 뚫어줬다. 그래서 중국 팔로군이 무사히 도망가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모택동(마오쩌둥), 팽덕회(펑더화이), 주은래(저우언라이), 등소평(덩샤오핑)등이 의열단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한다.
또, 의열단이 의용군으로 바뀌었고, 일본 패망 후 장개석과 모택동이 만주에서 싸울 때 모택동이 이겼다. 당시 조선의용군이 앞장서 싸웠다. 그때의 승리로 만주에 일본 관동군이 놓고간 신식 무기들을 다 얻을 수 있었고, 장개석을 이길 수 있었다. 또 조선의용대가 북한으로 가서 그들의 주류가 인민군이 된거다.
1949년 모택동이 장개석(장제스)를 물리치고 천안문에서 정부수립을 위한 연설을 할 때 “우리 위대하고 찬란한 오성홍기에는 조선인의 피가 스며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김일성과 모택동의 관계는 굉장히 수평적이다. 이승만-미국과의 관계와는 다르다.
역사는 정치의 어머니다. 역사를 모르면 정치현상을 알 수가 없다. 북-중관계는 그렇게 ‘큰나라’와 ‘작은나라’ 차원으로 볼 수가 없다. 북한과 중국은 대등한 관계다.
의열단이 독립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중국의 ‘인민해방군가’ 만든 사람이 정율성이다. 조선의열단 출신이다. 이육사, 윤세주, 신채호 등도 의열단원이다.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의 사업 내용을 보면, 기념사업이나 현장 답사 이외에 ‘조선의열단에 대한 남북학술회의 등 역사적 재평가 사업’이라는 게 눈에 띈다. 많은 활동을 계획 중인데, 북한에는 전달이 됐나?
전달은 됐다. 다만 북한이 지금 북미관계에 신경쓰느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단계가 아니다. 북미관계가 풀려야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는 ‘오늘날의 독립군’, ‘오늘날의 의열단’을 발굴하고 양성하는 사업도 하고 있는데, 한지가 좀 됐나.
아직 하지는 않았고, 야무지게 준비중이다.
예컨대, 요새 한류가 유행이다. 한류가 인기있는 이유에는 우리 민족의 예능적 끼가 첫 번째겠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제도적 장치다. 예컨대 스크린쿼터라는 게 있다. 우리나라 영화관에서 한국영화를 어느 정도 상영해야한다고 정해놓은 제도다. 그 제도가 있는 나라가 우리나라뿐이다.
인기있는 해외영화를 사러가면 그들이 끼워팔기를 한다. 그런 식으로 스크린이 외국영화로만 채워지게 된다. 미국 이외 나라의 대학교 연극영화과가 다 없어져버리는 현상도 일어났다.
우리나라는 법으로 1년에 절반을 반드시 한국영화를 상영해야한다고 정해놓았으니까, 우리 만의 공간이 생긴다. 여기서 사람들의 일자리도 생기고 개발도 된다. 이게 사실 한류의 뿌리다.
2005년쯤에 미국과 FTA를 할 때, 미국에서 스크린쿼터를 없애라고 조건을 달았다. 양보를 못한다고 버텼다. 그때 앞장서서 뒷받침해 준 사람이 영화배우 안성기와 정지영감독이다. 그 사람들이 시위하는 것 등을 카드로 해서 미국이랑 협상을 했다. 스크린쿼터를 3분의 1로 줄였다. 그런데도 현실적으론 50% 가까이 된다. 이전에 한국영화가 활성화가 되니까 비중이 유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안성기, 정지영 등이 우리나라의 독립군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독립군’.
이런 식으로 문화 등 여러 가지 분야에서 챙겨서 오늘날의 독립군, 오늘날의 의열단을 발굴해보려고 한다.
-국회의원 중에서도 찾는 게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이나 기초단체장 중에서도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윤동주 기념관을 만들기도 하고,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문제에 관해 조례를 만들어서 뒷받침한 사람이 김영종 종로구청장이다. 그 사람 아니었으면 소녀상 설치를 못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대중이 잘 모른다. 국내외에서 의미가 있는, 남이 잘 모르는데 활동을 한 사람들을 좀 챙겨서 의미있게 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조선의열단기념사업회가 원래 6년 전에 만들어졌다. 박근혜 정부 시절 보훈처에 등록을 하려고 했더니, 이름에 문제가 있는 둥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안 받아주길래 그럴 바엔 포기했다. 그냥 운영을 하다가 정권이 바뀌고 나서 재작년에 정식으로 등록했다. 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 이육사기념사업회 등 많은 단체가 있는데 다 아울러서 기념행사를 의미 깊게 치르고 싶다. 가능하면 국제적으로, 의열단 정신을 어떻게 다시 우리 시대에 승계하느냐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지려고 한다.
이지혜 인턴기자 ljh1213tz@poli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