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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NEWS1] [3·1절 100주년] ②그날 '양주 가래비시장' 만세함성이 귓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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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2-27 15:07 조회7,39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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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광적면 3·1운동 만세운동 현장에서 해마다 진행되는 재현운동과 연극 ⓒ News1

 

격렬했던 양주, 만세운동 정신 전국으로 번진 길목
19세 청년 유해정, 천왕에게 선전포고문 보냈다가 투옥


(양주=뉴스1) 이상휼 기자

1919년 3월28일 오후 4시께, 경기도 양주군(현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추교시장(현 가래비시장) 앞에 1000여명의 시위대가 모였다. 대부분 농민인 이들은 광적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다 일본 헌병의 제지를 받게되자 일단 해산한 뒤 다시 모여 추교시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의정부에서 급파한 일본 헌병들과 유양리(현 유양동)에서 대기하던 헌병들이 몰려와 주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채 주동자를 캐물으면서 해산을 종용했다. 
 

"뻔뻔스러운 도적놈들아, 남의 나라 국모를 죽이고 삼천리 국토를 강도질한 놈들아, 조국 독립을 하려고 부르는 만세를 막지 말라!

시위대 선두에 있었던 이용화가 태극기를 들고 일본 헌병들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면서 큰소리로 꾸짖었다. 고무된 시위대가 험악한 기세로 헌병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헌병들을 가래비 장터로 안내했던 면장 이하용이 슬그머니 광석리쪽으로 도망쳤다. 이를 본 군중 속의 누군가가 "면장놈부터 죽여라"고 일갈했다. 시위대는 성난 파도처럼 달려나가면서 돌팔매질하기 시작했다.

놀란 일본 헌병들은 100보가량 후퇴한 뒤 이내 깃발 든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시위대 선두에 있던 김진성, 백남식, 이용화가 현장에서 순국했다. 일본군의 발포는 계속됐고 시위대 40여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시위대는 2시간 만인 오후 6시께 해산됐다. 

이날 오후 8시께 소식을 들은 이웃마을 장흥면 교현리에서도 이회명 등 주민 수십여명이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날 교현리에서 300여명의 주민이 장흥면사무소로 돌입해 일본군의 총기를 빼앗는 등 적극적으로 싸웠다. 결국 일본군의 발포로 주민 1명이 숨지고 다수의 부상자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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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시  광적면 3·1운동 기념공원에서 주민이 직접 연기한 연극이 해마다 공연되고 있다. ⓒ News1   뉴스1


◇의병 전통·독립 의지 강했던 양주, 곳곳에서 만세운동
 

양주는 의병의 전통과 경험을 가진 곳으로 주민들의 국권 회복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강한 지역이었다. 서울 4대문 밖 동북지역은 모두 양주군이었을 정도로 면적이 넓었던 양주는 서울의 관문이었다. 이러한 역사적·지리적 배경을 가진 양주는 만세운동의 열기가 다른 지역보다 더 가열찼다. 특히 양주의 3·1운동은 만세운동이 농촌사회로 뻗어나가는 시발점이 됐다. 

가래비장터 만세운동 하루 전날인 3월27일에는 양주군 백석면(현 백석읍) 오산리 대들벌에서 백석면사무소까지 주민 600여명이 만세 시위를 했다. 시위를 주도한 안종태는 "조선은 일본에게서 독립할 수 있다"면서 주민들을 독려했다. 이날 양주군 구리면(현 구리시)에서 주민 30여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26일에는 양주군 이담면(현 동두천시)에서 주민 1300명이 시위를 벌이며 기마대 일본군의 말다리를 몽둥이로 후려쳐 쓰러뜨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주동자 7명이 체포됐다.

진접면 봉선사 승려인 강완숙, 김성숙, 이순재는 '조선독립단 임시사무소 명의로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이 독립국이 될 것을 결정했다.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운동하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내용의 문건 200매를 인쇄해 인근 민가에 배포했다. 이 격문에 호응한 주민 600여명이 3월31일 광릉천변에서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화도면에서는 3월18일 이달용의 주도로 주민 200여명이 만세시위를 일으켰으나 일본군이 주동자 3명을 구금했다. 이에 만세시위자가 1000여명으로 늘어났고 헌병대 병참 앞에서 3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무차별 발포를 감행해 이달용 등 4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와부면 송촌리에서는 3월15일 이정성과 김정하가 주민 500여명을 이끌고 면사무소가 있는 덕소리로 행진했다. 시위대는 총칼로 저지하는 일본군을 몽둥이로 맞섰으나 40명이 체포됐다. 

미금면 평내리에서는 3월13일 농사꾼 이승익의 주도로 100여명의 주민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고, 다음날인 14일 150여명이 다시 집결해 평내리에서 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가 있는 금곡리로 행진하다가 일본군의 제지를 받아 해산했다.

노해면(현 노원구) 창동리에서도 500여명이 시위를 벌여 92명이 체포됐고, 진건면 오남리에서도 수십여명이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자일리에서도 30여명이 시위했다. 또 3월30일 주내면에서도 600여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를 공격했다.  

별내면 고산리의 19세 청년 유해정은 붓을 들어 "만국이 구 한국의 독립을 승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돌려주기를 꺼린다면 분개한 백성이 일제히 궐기해 불의의 나라에 보복할 것이다. 나도 한자루의 칼을 품었으니, 한번 죽음으로써 원한을 씻을 날이 있을 것이다"는 내용을 쓴 뒤 천왕에게 전달되도록 동경부지사 앞으로 보냈다. 이 편지는 3월27일 동경부청에 도착해 궁내성 궁내대신 관방 총무과 앞으로 전달됐다. 유해정은 '천왕에 대한 불경행위'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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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광적면 3·1운동 만세운동 현장에서 해마다 진행되는 재현운동 ⓒ 뉴스1


◇경기북부에서 가장 격렬했던 양주 가래비 만세운동

양주군 내에서 벌어진 만세운동 가운데 광적면 가래비 만세운동이 가장 격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3·1운동 이후 가납리 일대의 논은 '만세답'이라고 불렸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주민들과 뜻있는 지역유지들이 가래비 3·1운동기념비를 시위 현장에 세우고 기념공원을 조성했다. 

4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가래비시장은 많은 인파가 몰리고 각종 문물과 정보가 집결하는 곳이었다. 서울과 인근 파주 봉일천장, 포천 솔모루장 등을 통해 3·1운동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광적면 가납리 일대에서는 1919년 3·1운동 초기부터 만세운동에 대한 사발통문이 나도는 등 독립만세의 기운이 융성했다.

양주시는 2006년부터 '만세배미' 또는 '만세답'으로 불리던 광적면 만세운동 현장에서 격렬했던 3·1운동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해마다 1000여명 이상의 시민이 참석해 가래비 3·1운동기념공원을 시작으로 광적면 시내 1㎞를 행진한다. 또 '천명의 함성', '슬픈 자화상' 등의 만세운동 재현 연극도 공연한다.

daidaloz@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