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용, 백운대 암반에 만세선창 기록 새기고 육성증언
임정 국무위원 지낸 김성숙, 한위건이라고 언급
'기미독립선언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서울=뉴스1) 김도용 기자 = 일제강점에 저항해 3?1 운동이 일어난 지 정확히 100년이 지났다. 과연 누가 그날 탑골공원에 모인 군중 앞에서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했을까? 지금까지 연구결과나 자료를 토대로 미뤄볼 때 정재용(1886~1976)과 한위건(1896~1937), 2명이 유력한 후보로 꼽힌다.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서울 탑골공원에서는 수많은 군중이 민족대표를 기다렸다. 그런데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은 탑골공원이 아닌 인사동 요릿집 태화관에 모였다. 이들은 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했다. 이어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일본 경찰에 통고, 스스로 체포됐다. '비폭력 저항'이 이유였다.
계획과 달랐던 민족대표들의 움직임에 탑골공원에 모인 5000여 군중은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누군가'의 입에서 시작된 독립선언서로 3?1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독립선언서를 처음 낭독한 '인물'을 놓고 논란이 많았는데 가장 유력한 인물로 정재용이 꼽혔다. 당시 감리교 전도사였던 정재용은 탑골공원의 팔각정 단상 위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고 알려졌다.
정재용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일로 1919년 8월 체포돼 평양 감옥에서 2년 6개월을 지냈다. 출옥 후에도 독립운동단체 의용단에 들어가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정부는 정재용이 사망한 직후 1977년에 건국포장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정재용은 출옥 후 북한산 백운대 정상 암반에 끌과 망치를 이용해 직접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했다는 내용을 새긴 것으로 전해졌다. 더불어 2017년 유족들이 정재용의 육성 강연을 발굴,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처음 낭독했다는 주장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최근 정재용이 아닌 당시 경성의전 학생이었던 한위건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지난 2월 23일에는 한국과 일본의 학자 10명이 5년간 진행한 3?1운동 공동연구 결과, 1919년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을 분석해 당시 선언서를 낭독한 인물이 한위건임이 확실하다고 밝혔다.
한위건은 3·1 운동 이후 경성의전 2학년을 중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뒤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했다. 이후 조선공산당 지도부로 활동하고 중국공산당에도 입당했다.
한?일 공동연구에 참여한 김태웅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뉴스1과 통화에서 "주류학계에서는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던 김성숙 선생은 한위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재미교포학자 이정식이 쓴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에 실린 김성숙 선생의 인터뷰에 그 내용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각에서는 당시 한위건을 보호하려고 주변에서 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분명한 것은 아직도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인물에 대해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역시 독립선언서 낭독자가 정재용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신 교수는 "김성숙 선생이 한위건이라는 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정재용이 했다는 주장도 있다. 증언이 서로 다르다. 무엇이 사실인지 연구를 해봐야 한다. 조금 더 검토가 필요하다"고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dyk0609@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