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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김원봉 서훈 원하지만..." 유족은 왜 문 대통령 걱정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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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3-04 10:16 조회7,6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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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약산 동생 김학봉 여사 장례식장에서 만난 아들 김태영 박사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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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 시절 김원봉. 우측 끝이 약산 김원봉이다.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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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산이 국외에서 독립투쟁을 할 당시 국내에 남아 있던 가족. 앞줄 중앙이 약산의 막내 동생 김학봉씨.

뒷줄 오른쪽 양복을 입은 사람이 의열단 단원이다. 약산이 국내 가족들을 보고 싶다하여 국내에 잠입했던

의열단원과 같이 찍은 사진. ⓒ김태영 


"어머니(김학봉 여사)가 평생 바라왔던 약산(외삼촌 김원봉)의 서훈, 저도 원합니다. 하지만 모든 게 정치적인 상황과 연결돼 있어요. 내년 총선을 앞두고 어떻게 급변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아무리 서훈을 하고 싶어 해도 부담될 수밖에 없습니다. 대통령 스스로 '자리가 상관없다' 말할 정도로 용기내야 약산의 서훈이 가능할 겁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에요."
 

약산 김원봉의 외조카 김태영씨는 26일 어머니 김학봉 여사의 빈소에서 최근 논란이 된 '약산 서훈'에 대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학봉 여사는 경남 밀양 출신 항일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장군의 막내 동생이다. 약산과는 34살 터울로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48년 약산이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떠난 뒤, 단 하루도 편한 날을 보낸 적이 없다.

한국전쟁 중 오빠 4명과 사촌 5명이 보도연맹사건으로 총살 당했다. 아버지도 고문을 당한 뒤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남은 오빠는 처형된 형제와 사촌들의 시신을 수습했다는 이유로 5.16 쿠데타 이후 군사혁명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김학봉 여사도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크게 모욕 당했다. 김 여사는 결국 김태영씨를 포함해 자녀들을 고아원으로 보내 생활하게 했다. 1980년 연좌제가 폐지된 뒤에야 아들 김태영씨는 미국으로 떠났다. 남은 김학봉 여사는 오빠 김원봉의 명예회복을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 어떤 정권에서도 약산 김원봉의 서훈을 허락하지 않았다. 김학봉 여사는 지난 2월 24일 새벽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시대를 살았던 어머니가 떠났다, 이제 내가 다음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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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빠 약산 김원봉의 서훈을 끝내 확인하지 못하고 떠난 김학봉 여사. 지난 24일 영면했다.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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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산 김원봉의 외조카 김태영 박사. 지난26일 김학봉 여사의 빈소에서 만났다. ⓒ김종훈 

약산의 외조카이자 김학봉 여사의 둘째 아들인 김태영씨는 1980년 스물여섯 나이에 미국으로 떠났다. 의류업에 종사하며 경영학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어머니 김학봉 여사는 미국에서 성공한 아들이 40세가 되자 오빠 약산과 우리나라 역사에 관련된 일을 하기를 바랐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김태영씨는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지난 25일 오후 급히 귀국했다. <오마이뉴스>가 지난 26일 빈소를 찾았을 때, 그는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김학봉 여사의 빈소를 찾은 여러 시민들을 만나고 있었다.
 
김태영씨는 "올해는 일제로부터 나라를 빼앗긴 지 110년이다, 내년이면 분단된 지 70년"이라면서 "그 시대를 살았던 어머니가 떠났다, 이제 제가 그 다음 세대인데 어머니만큼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남은 가족들은 더 이상 (색깔론) 피해를 당하지 않게 하겠다"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녹록지가 않다. 약산 서훈과 관련해 논란이 일자 정태옥 자유한국당 의원은 "김원봉 등 북한정권 수립에 직접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에 반대한다"면서 "이는 김일성에게도 독립훈장을 주고 후손인 김정은에게 연금도 주어야 할 일"이라고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독립운동의 큰별 약산 김원봉의 삶
 
1898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한 약산 김원봉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다. 10대 때부터 일왕 생일 때 받은 일장기를 화장실 변기에 내버리는 등 항일정신이 투철했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1919년 의열단을 조직, 의백으로 활동하며 국내 일제 수탈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 등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1920년대의 의열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내분으로 크게 혼란을 겪을 때, 임정 대신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했다. 약산은 1930년대에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운 뒤 이육사와 정율성 등 애국지사를 직접 길러냈다. 1938년에는 항일운동의 선봉을 맡았던 '조선의용대'를 창설, 총대장을 맡았다.
 
이뿐이 아니다. 항일운동을 통합하는 큰 축이 된 '조선민족혁명당'의 총서기도 맡았다. 1940년대에 들어선 김구 선생과 합심해 우리 민족사 최초로 좌우합작도 이뤘다.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된 뒤에는 광복군 부사령관도 역임했다. 동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도 맡아 중국에서 마지막까지 항일운동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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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무한에서 1938년 10월 10일 창설된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조선의용대는 중국관내 최초로 조직된 한국인 군사조직으로 임정의 한국광복군보다 2년 앞서 창설되었다.

조선의용대의 주력부대는 화북지역 태항산으로 이동하고 조선의용대 본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다.

제1열에서 항일변호사 허헌의 딸이자 북한 초대 보건상 허정숙(오른쪽 2번째 여성), 의열단장 김원봉(4번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리집중(5번째,) 석정 윤세주(6번째),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성숙(7번째)

북한 초대 재정상 최창익(8번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장이자 북한 인민군 부총참모장 박효삼(11번째)의 얼굴이 보인다.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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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내각상(제1열 좌측부터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정준택, 부수상 겸 

산업상 김책, 부수상 홍명희, 수상 김일성,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민족보위상 최용건, 문화선전상

허정숙, 제2열 보건상 리영남, 국가검열상 김원봉, 교육상 백남운, 교통상 주녕하, 상업상 장시후, 재정

상 최창익, 내무상 박일후, 제3열 농업상 박문규, 무임소상 리극로, 도시행정상 리용, 체신상 김정주,

사법상 리승엽, 로동상 최성택) ⓒ NARA/박도


그러나 해방된 조국에서 약산이 설 자리는 없었다. 오히려 1947년 초 미군정의 비호 아래 다시 득세한 친일경찰 노덕술에 끌려가 뺨을 맞는 등 모욕을 당했다. 함께 독립운동했던 금릉대학(현 난징대학) 동문 몽양 여운형 선생은 그해 여름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테러로 사망했다.
 
약산은 1948년 '자발적으로' 월북했다.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됐고, 같은 해 9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이후 노동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내다가 1958년 김일성의 연안파 제거 때 숙청됐다고 전해진다.

"약산 찾아 북한에 갈 기회 있었지만..."
 
미국 영주권자인 김태영씨는 "지금까지 약산의 흔적과 남은 가족들을 찾아 북한에 몇 번은 갈 수 있었지만 가지 않았다, 가면 뭐하나 기분만 나빠질 텐데"라며 "내가 들은 약산의 마지막은 1958년 어딘가에 수용됐고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말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약산의 산소는 북한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본다, 아무리 북한 정권이라도 약산의 독립운동 업적을 고려했을 때 그냥 없애 버리면 후환이 두려웠을 것이다, 북한에도 애국열사능이 있으니 어딘가에 약산의 묘도 분명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지점에서 김씨는 이날 진행된 2시간여의 인터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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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파 김백일의 묘, 서울현충원 내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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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파 신태영의 묘. 양지바른 곳에 위치해 있다.ⓒ김종훈 

김태영씨는 "우리 사회가 약산 김원봉을 강조할수록 감춰줬던 친일파의 그림자 또한 함께 드러날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어떤 의미냐?'라고 물으니 그는 "약산의 서훈은 이미 상징적인 이야기가 됐다"면서 "약산이 주목받으면 받을수록 국립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친일파도 함께 주목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민들이 약산의 서훈을 요청할수록 반대급부로 이미 서훈을 받은 친일파의 행적도 함께 부각될 것이라는 의미다. 현재 국립현충원에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 11월 발표한 친일 인사 명단에 포함된 인물 11명(김백일, 김홍준,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백낙준, 김석범, 백홍석, 송석하, 신현준)이 잠들어 있다.
 
그동안 독립유공자와 후손들, 시민단체가 나서서 '서훈을 취소하고 묘를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국회에서 관련법이 통과되지 않아 '친일파는 분명하지만 서훈 또한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국립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시간이 해결할 것...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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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명단, 80여명이나 되지만 김원봉만 서훈을 받지 못했다.ⓒ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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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받지 못한 김원봉,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중 유일하다.ⓒ김종훈 

김태영씨는 "솔직히 약산의 서훈에 개의치 않는다"면서 "그럼에도 젊은 청년들의 호응이 커서 언젠가는 약산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라 믿는다"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김씨는 "오는 11월쯤 서울에서 약산김원봉기념사업회를 발족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의열단 독립운동 정신 계승은 물론 중국 독립운동 현장 등 역사기행을 학생들과 함께 할 것"이라면서 "국민들이 한평생 조국독립을 위해 애쓴 약산에 대한 진실을 알면 서훈 또한 언젠가 자연스럽게 이뤄지지 않겠냐"라고 덧붙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당시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 드리고, 술 한잔 바치고 싶다"고 남긴 바 있다. 올 초 보훈혁신위원회도 보훈처에 "독립운동에 대한 최종적 평가 기준은 1945년 8월 15일 시점으로 고려해야 한다"면서 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약산 김원봉은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현행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으로는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인물은 선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훈처는 지난해 독립유공자 선정 기준을 개정해 '광복 후 행적 불분명자'(사회주의 활동 경력자)도 포상할 수 있도록 했지만, '북한 정권 수립에 직접 기여하지 않은 인물이어야 한다'라고 명시했다.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는 약산 김원봉을 포함해 그의 평생 친구이자 동지였던 윤세주 열사 등 80여 명이며, 이중 약산을 제외한 79명이 2019년 2월 기준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서훈을 받았다. 약산 김원봉만이 유일하게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약산의 막내 동생이자 김태영씨의 어머니인 김학봉 여사는 가족과 친지들의 배웅을 받으며 27일 오전 밀양 시청 뒤쪽에 위치한 선영에 모셔졌다. 가족들은 김학봉 여사의 영정사진을 들고 약산의 생가터에 세워진 의열기념관과 밀양독립기념관을 마지막으로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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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봉 여사의 영정사진을 들고 가족들이 약산 생가 앞에 섰다. ⓒ장창걸 극단 밀양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