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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해방 전엔 일제, 해방 후엔 독재... 평생 싸운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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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1-04-19 10:38 조회3,19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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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현충원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목표는 단순히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나라 민주공화국을 세우고자 했다. 그래서 해방된 조국의 모습이 그들의 기대와는 다른 길로 가고 있을 때, 독립운동가들이 그에 맞서 싸우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인물의 대표주자는 함석헌(1901~1989)과 장준하(1918~1975)다.

지금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함석헌은 1919년 3.1혁명 당시 평양고보 학생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래 1940년의 계우회 사건과 1942년의 <성서조선> 필화사건으로 연이어 1년씩 옥살이를 했고,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 독재정권과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온갖 수난을 감내하면서 재야 민주화운동을 이끈 인물이었다.

일제의 학병으로 끌려갔던 장준하 역시 탈출해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서 활약했다. 해방 이후엔 <사상계>를 창간해 이승만 독재정권과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중 1975년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까지 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삶을 산 이가 함석헌과 장준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등에 안장돼 있는 독립유공자 가운데에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이후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에 나섰던 이들이 여럿 있다. 오늘은 이런 인물들의 묘를 집중 탐방한다.


독립유공자 묘역에서 만나는 '민주화 운동가' 정이형과 안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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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학규


애국지사 묘역에서 이름이 바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돼 있는 독립운동가 가운데 민주화 운동에 나섰던 인물로 정이형(1897~1956)과 안재환(1898~1977)이 있다.
 

평북 의주 출신의 정이형은 일제 강점기 동안 무려 19년을 옥살이로 보내다 해방과 함께 공주형무소에서 출옥한 조선 내 최장기수이기도 했다.

1919년 3.1혁명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만주로 건너가 대한통의부와 정의부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중견 간부로 활약한 정이형은 1922년에는 초산경찰서의 한 파출소를 습격해 일경 다까하시(高橋) 등 3인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는가 하면, 1925년 3월에는 부하 30여 명을 인솔하고 평안북도 지방에 진입하여 일경주재소 5개 소를 습격한 후 허다한 전리품을 챙겨 무사히 귀대하는 등 여러 차례 국내진공작전에 참여하여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정이형은 1926년 4월에는 민족주의 계열의 양기탁·현정경·오동진, 천도교 혁신파와 형평사를 이끌던 김봉국·이동락·이동구·송헌, 노령에서 온 최동희(최소수)·이규풍·주진수 등과 함께 만주에서 고려혁명당을 조직할 때 중앙위원으로도 활약했다.

정이형이 일체에 체포된 것은 고려혁명당을 결성한 다음 해인 1927년 3월이었다. 길림성에서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돼 신의주로 압송된 정이형은 무기징역형을 언도받고 해방될 때까지 옥살이를 해야 했다.

정이형은 해방정국에서 친일파 척결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 인물로도 유명했다. 그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지내면서 1947년 친일파처단 조례를 만들기 위한 기초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 제정을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애석하게도 미군정이 공포를 거부하면서 정이형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로 미뤄진 친일청산의 과제가 이승만 정부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을 때 정이형의 향후 활동방향은 더 분명해졌을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중도좌파의 위치에서 좌우합작을 위한 노력을 지지했던 정이형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1948년 3월에 남조선과도입법의원직을 사퇴했다. 분단과 전쟁을 막고자 독립운동자동맹을 대표해 남북협상에도 참여했다. 분단이 현실로 다가오고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이후인 1950년에는 5.30총선(2대 총선)에 좌우합작위원회의 정신을 계승한 민족자주연맹(민련, 의장 김규식) 소속으로 마포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정이형은 두 차례에 걸쳐 불법적으로 헌법을 개정하면서 장기집권과 본격적인 독재의 길에 접어든 이승만 정권에 맞서 다시 몸을 추스르면서 1955년 9월에는 '광릉회합'에 참여하는 등 혁신정당 건설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정이형은 1956년 심장병으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뜨고 만다. 이제 막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발을 내딛자마자 사망했던 것이다.

평남 안주 출신의 안재환은 민족혁명당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그는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를 나왔고, 무한한인혁명청년회와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한국혁명당과 철혈단,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등을 거쳐 5당 통합의 민족혁명당에서 중견간부로도 활약했다. 1937년 12월에는 일본 영사관에 체포돼 평양으로 압송되어 옥살이도 했지만, 출옥 후 다시 상하이로 탈출해 1943년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비서처에서 부비서장으로 임명돼 활동을 지속했다.

안재환도 이승만의 독재화에 맞서 혁신정당 운동에 참여한다. 1955년부터 본격화한 조봉암의 진보당(준)에서 중앙상임위원회 상임위원으로 활약했다. 혁신세력의 대동단결을 제창하면서 민주혁신당 운동에 참여했다.

안재환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박정희 군사독재 시기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는 1960년대 광복회 상임이사를 지내기도 했는데, 유신독재가 본격화되자 1974년 11월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주도한 '민주회복 국민선언 대회'(기독교회관 2층)에 독립투사를 대표해 참석했다. 윤보선, 김영삼, 김대중 등도 참석한 이 선언에는 독립유공자 중에는 안재환 외에 정화암, 유석현, 김홍일, 함석헌, 이인, 정일형, 이희승, 김재호 등이 함께했다. 이 대회의 결과로 유신독재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의 결집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가 발족, 반유신 투쟁의 구심 역할을 하게 된다.

안재환은 1972년에 분단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민간차원에서 결성된 민족통일촉진회에도 유석현, 함석헌, 장준하, 김재호 등 독립운동가 출신들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한편,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돼 있는 이강훈(1903~2003)도 재일동포 사회에서 민단을 주도하면서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인물이다. 4.19 혁명 직후 귀국해 한국사회당과 민족통일당 결성을 주도하는 등 혁신정당 운동에 참여했던 일로 5.16 쿠데타 이후 '혁신정당 활동을 가장한 조총련의 공작원'으로 몰려 감옥살이를 하는 수난을 당했던 이력을 갖고 있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의 김성숙, 평생 불의에 맞서 싸운 '독립투사' '민주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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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학규


독립유공자 묘역 바로 위에 위치한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운암 김성숙(金星淑, 1898~1969)의 묘가 있다.

평북 철산 출신의 김성숙은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로 소개되기도 한 승려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으로도 활약했다.

1919년 3.1혁명 당시 경기도 남양주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6개월의 옥살이를 했던 김성숙은 출옥 후 무산자동맹과 노동공제회 등에서 활동하다 1923년에 중국으로 망명해 창일당, 의열단, 광저우혁명,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선연맹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김성숙은 약산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지냈는가 하면, 통합 임시정부에서 선전위원과 국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해방 이후에도 김성숙은 우리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혁신계의 대표 주자이자 민주투사로 활약했다. 그 길은 독립운동 시기에 이어 평생 고난의 길이었다.

해방이후 김성숙의 고난의 길은 1946년 3월부터 시작됐는데,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활동 과정에서 미군정에 의해 6개월의 구금령을 언도받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김성숙이 여운형의 인민당에 참여하면서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 자격으로 전국 순회 강연회를 진행하던 중 전주에서 미군정을 비판했다는 이유였다. 이때는 다행히 좌우합작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여운형의 설득으로 곧 석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해방정국에서 김성숙의 고난의 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먼저 근로인민당 조직국장으로 있던 1948년 7월 근로인민당 간부 53명이 검찰에 송치될 때 김성숙도 불구속 상태로 송치되는 일이 발생한다. 1년 전 피격당한 여운형의 1주기 추모식(7.19)을 준비하던 중 수도경찰청에 의해 근민당 간부 10여 명이 사전에 체포됐다. 그럼에도 경찰의 비상경계 하에서 강행한 여운형 1주기 추모식이 끝난 직후에는 다시 사회자 이영선을 비롯하여 100여 명을 '남한 만의 단정 반대를 내세워 폭동을 계획'했다는 이유로 또다시 수도경찰청에 연행했던 것.

김성숙은 계속되는 남북협상파에 대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1950년에는 5.30 총선(2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족자주연맹 소속으로 경기도 고양에서 출마한다. 이때도 결국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는데, 무소속의 난립으로 애당초 쉽지 않은 선거였음에도 선거 5일 전 위기의식을 느낀 이승만 정권이 성시백의 '북로당남반부정치위원회 사건'을 확대·조작해 김성숙 등 중간파를 포섭대상자로 선정해 공작했다고 발표해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6.25 한국전쟁 시기에 김성숙은 급작스러운 전쟁 발발로 미처 피난하지 못했다가 1.4후퇴 시기 부산으로 피난하는데, 자신들은 먼저 피난하고 한강 다리를 성급하게 끊었던 이승만 정권에 의해 북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부산형무소에 한 달간 구금당하는 수모도 겪어야 했다.

전쟁 이후 김성숙은 이승만의 독재화를 막기 위해 혁신정당 운동에 다시 나선다. 진보당 건설 과정에 함께했던 김성숙은 민주혁신파의 대동단결을 제창하며 1956년에는 민주혁신당 창당 과정에 참여한다. 하지만 이때도 '근로인민당 재건 기도 사건'의 총책으로 지목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6개월간 옥살이를 하면서 또다시 좌절해야만 했다. '근로인민당 재건 기도 사건'은 1957년 이승만 정권의 혁신계 탄압을 위한 방책으로 북의 간첩과 연계시킨 조작 사건이었다.

4.19혁명 이후 열린 공간에서 김성숙에게는 새로운 길이 열리는 듯했다. 그는 혁신정당인 사회대중당의 창당에 참여했고, 재야·혁신세력의 결집체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의 의장단의 일원으로 통일운동에도 나서는 등 활발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이번에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그에게는 다시 감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참여했던 통일사회당이 중립화 평화통일을 주창했다는 이유로 소급입법인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한 쿠데타 세력에 의해 또다시 구속됐던 것이다. 그나마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10개월 만에 풀려났지만, 4374명의 정치활동 규제 대상에 포함돼 한동안 침묵을 강요당해야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김성숙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던 듯하다. 정치활동 규제가 풀린 1964년에는 병중에도 민주사회주의 정당 건설을 준비하는 '민주사회주의 동지회'(민사동지회)에 참여했던 김성숙은 1965년에는 제주 출신의 동명이인의 김성숙(金成璹)과 통일사회당 공동준비위원장을 맡아 박정희 정권에서도 혁신정당의 꿈을 일궈 나간다.

오직 혁신정당의 길을 걷던 김성숙이 보수야당에 참여한 것은 1966년부터였다. 이때 김성숙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 효과적으로 맞설 필요가 있다는 새로운 판단을 하게 된다. 그는 1966년 '선명 야당'을 표방한 신한당이 창당될 때 지도위원으로 참여했고, 1967년 신한당과 민중당을 통합한 '선명 야당' 신민당을 창당할 때도 고문으로 참여한다.

하지만 기관지 천식으로 고생하던 병이 도지면서 김성숙 자신이 선택한 새로운 길이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되는지 확인도 하지 못한 채 1969년에 서거하고 만다.

눈 감는 순간까지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이강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오산 이강(1878~1964)의 묘가 있다.

일찍이 안창호와 함께 신민회에 참여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임시의정원 의장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해온 평북 용강 출신의 이강 역시 해방 이후에도 노구를 이끌고 민주화운동에도 나섰던 인물이다.

이승만 독재정권 시기인 1956년 대선을 앞두고는 흥사단을 이끌면서 독립운동가 정화암, 이을규, 조경한 등과 함께 이승만 독재에 맞선 야당(민주당과 진보당)의 연합을 호소하는 데 앞장섰다. 5.16 군사정변 이후인 1963년에는 독립운동가 신숙 등과 함께 구국민족회의를 결성해 과도내각 구성과 범야권의 단결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강은 1964년 박정희 정권이 굴욕적 한일회담을 추진할 때는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의 지도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하는 등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 

야당 지도자로 유신독재에 맞섰던 김홍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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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학규


독립유공자 묘역 위편에 있는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김홍일(1898~1980)도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1960, 1970년대에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김홍일은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에 폭탄을 제공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는 당시 중국 국민혁명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1931년부터 상하이에서 병기창 주임으로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북 용천 출신의 김홍일이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18년 9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면서부터였다. 만주와 연해주, 중국 관내를 누빈 김홍일은 중국군 장교로 소장까지 올랐고, 사단급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과 수차례 전투를 벌여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김홍일은 1940년대에는 한국광복군의 참모장을 맡아 활약하기도 했다.

그런 김홍일이 민주화 운동에 나선 것은 박정희의 굴욕적인 한일회담 추진에 반대하면서부터였다. 김홍일은 1964년 3월에 결성된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의 지도위원으로 참여했다. 1965년에는 박병권, 손원일 등과 함께 예비역 장성 11명의 명의로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김홍일은 사병들에게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는 이유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박병권, 박원빈, 김재춘 등과 함께 전격 구속됐다.

김홍일은 이를 계기로 1960, 1970년대 신민당 당수를 맡는 등 야당의 정치지도자로도 활약했다. 그는 유신독재 시기인 1973년엔 장준하 등과 함께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성명을 발표하는가 하면, 1974년 11월에는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주도한 '민주회복 국민선언 대회'(기독교회관 2층)에도 참석했다. 이 대회의 결과 발족한 유신독재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의 결집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고문도 맡았다.


국가유공자 제1묘역의 라용균·유석현·정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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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학규


국가유공자 제1묘역에는 2.8독립선언의 라용균(1895~1984)과 의열단의 유석현(1900~1987), 3.1운동 등에 참여한 정일형(1904~1982) 등 3명의 독립운동가가 안장돼 있는데, 이들은 모두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한 이력을 갖고 있다. 

라용균은 1919년 3.1혁명 직전에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이 돼 발표한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고, 1922년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상하이로 돌아와서는 1923년 1월에 열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미래를 논했던 국민대표회의를 준비하는 주비회 위원으로도 활약했다.

해방 이후 제헌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라용균은 4.19혁명 이후 민주당 정부에서 보건사회부장관을 역임했고, 6대 국회에서는 국회부의장도 지냈다. 라용균의 호를 따서 매년 시상하는 '백봉신사상'은 현역 국회의원에게 주어지는 여러 상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라용균도 1964년 박정희 정권의 졸속적인 한일회담 추진을 비판하며 결성된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의 지도위원으로 참여했다.

광복회 회장 등을 역임한 유석현은 의열단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활약 중 일경의 추적을 받게 되자 만주로 건너가 1920년 7월 중국 천진에서 의열단에 입단했던 유석현은 1923년 5월 의열단의 제2차 거사 때 북경에서 폭탄 36개, 권총 5정, 독립선언문 3000매 등을 김시현·황옥·김지섭 등과 함께 몰래 들여와 거사를 추진하던 중 밀고자에 의해 1923년 3월 15일 붙잡혔다.

영화 <밀정>의 시대적 배경이 됐던 바로 그 시기였다. 유석현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는데, 만기 출옥한 후 1941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유석현은 이승만 독재정권과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 운동은 물론 장면 정부 하에서도 '인민전원주의'를 표방한 이주당(二主黨)을 통해 한미경제협정반대 투쟁에 참여하는가 하면 반일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도 앞장섰고, 2대악법(반공임시특별법, 데모규제법) 저지투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 내내 블랙리스트에 올라 감시 대상이었던 유석현은 5.16 군사정변 이후인 1962년에는 '이주당 반혁명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어 고초를 겪었는가 하면, 1964년에는 굴욕적 한일회담반대 투쟁인 6.3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수배 중 체포되어 구속되기도 했다.

유석현은 1970년대에 들어서 '3.1국민회의'와 '민족통일촉진회' 등에 참여했고, 유신독재 시기인 1974년 11월에는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 71명의 이름으로 진행된 '민주회복 국민선언 대회'(기독교회관 2층)에 독립투사를 대표해 안재환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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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석현은 1980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과 손잡고 민주정의당 창당과정에서 임시의장을 맡았는가 하면 이후 고문이 돼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그동안 독립운동가 출신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로 살아온 삶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정일형도 일제 강점기 끊임없이 수난을 당한 인물이었다. 1919년 2월 평양 광성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5세의 나이로 3.1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평양경찰서에 붙잡힌 것을 시작으로 1937년 10월에는 평양지방 감리교 기독청년연합회 회장을 지낼 당시에는 안창호 특별강연회를 개최한 것이 빌미가 돼 유언비어 유포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개월간 구류 생활을 했다. 곧이어 흥사단 사건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붙잡혀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40년에는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에 저항하다가 수차례에 걸쳐 구금당하기도 했고, 1942년 1월 서울에서 이동욱·안흥국·한익수와 함께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등 국제정세를 논의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해방 이후 정치인의 길을 걸은 정일형은 4.19 혁명 이후 민주당 정부에서 외무부장관을 지냈는가 하면 8선의 국회의원을 역임했는데,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맞서 1974년의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하는 등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다가 1976년의 '3.1 민주구국선언' 사건(명동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3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렇게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에도 앞장섰던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을 살펴봤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일제에 맞선 독립 운동과 독재에 맞선 민주화 운동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만들어가는 데 궤를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 출처 : 오마이뉴스 김학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