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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오마이뉴스] 추모사 한줄 없는 어느 독립운동가의 추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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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9-10 16:05 조회7,41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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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동암 차리석 선생 서거 73주기, 아들 차영조씨를 만나다


흔한 추모사도, 대형 조화도 없었다. 가을의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초록의 묘역엔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 가득했다.

지난 9일 오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효창원) 내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서 열린 '동암 차리석 선생 서거 73주기 추모식'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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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동암 차리석 선생의 외아들인 차영조씨 ⓒ 김경준 

홀로 묘역을 지키고 있던 한 노신사

차리석 선생의 기일을 맞아 묘역에 간 기자를 반겨준 것은 홀로 묘소를 지키고 있던 노년의 신사였다. 차리석 선생의 외아들 차영조(74)씨. 아무도 없는 묘역에 단 둘만 있는 게 민망해 "추모식 시간이 미뤄졌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차씨는 웃으며 "추모식은 원래 치르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이유를 물었다.

"원래부터 거창한 추모식을 치르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냥 이렇게 참배객들이 오시면 제가 맞이해서 함께 묵념하고 마음으로 추모하면 됐지, 괜히 야단법석을 떨어서 편안하게 주무시고 계시는 아버님을 깨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차씨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효창공원 관리소 직원이 향로를 들고 왔지만 차씨는 "그냥 가지고 내려가시라"면서 손사래를 쳤다. 차씨의 거절에 관리소 직원도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기왕 가지고 올라왔는데 향은 피우자"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그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일반적으로 독립운동가의 추모식은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이 달의 보훈 행사' 코너를 통해 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차리석 선생의 추모식은 명단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차씨가 추모식을 개최한다고만 하면 보훈처의 후원을 받아 성대하게 추모식을 열 수도 있지만, 애시당초 차씨가 추모식을 열 생각이 없기에 보훈처에서도 별도의 공지를 하지 않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둥, 동암 차리석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과 비서장을 역임한 차리석(車利錫, 1881~1945) 선생은 임시정부의 기둥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1919년 평양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상해로 건너간 선생은 임시정부 수립 직후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정부와 역정을 함께했다. 

1948년 사회장 당시 "탁월한 사무처리의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백범 김구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의 추모사는 차리석 선생이 독립운동 진영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선생은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했으나 환국을 준비하던 중이던 9월 9일에 과로로 병사하고 말았다. 환국한 백범은 가장 먼저 임시정부 요인들의 유해를 봉환하는 사업에 착수했고, 1948년 지금의 자리에 안장될 수 있었다.

효창공원 성역화 결정됐지만… 관리는 여전히 아쉬워

적막함만이 감도는 묘역에서 차씨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참배객들이 한두 사람씩 모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차씨와 함께 활동하는 관련 단체 회원들이었다. 이날 참배하러 온 인원은 고작 10명 남짓에 불과했다. 묘역에 모인 이들은 다함께 묵념을 올리는 것으로 간단하게 추모식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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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리석 선생을 비롯한 이동녕, 조성환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참배하는 참배객들 ⓒ 김경준 

이날 묘소 주변에는 누렇게 죽은 풀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아침 일찍 차씨가 와서 홀로 뽑은 잡초들이었다. 차씨는 "국치일(8월 29일)에 왔을 때도 잡초가 무성하더니 오늘도 잡초가 많더라"라며 "구청에서 관리한다고는 하는데 여전히 소홀한 부분이 있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국립현충원에 가보면 잡초를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라며 여전히 홀대 받는 효창공원의 현실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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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선열 묘역의 잡초들을 직접 옮기고 있는 차영조씨 ⓒ 김경준 

효창공원은 해방 후 환국한 백범이 독립운동 선열 묘역으로 조성한 공간이다. 이봉창·윤봉길·백정기·이동녕·조성환·차리석 등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아직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허묘(虛墓)도 조성돼 있다. 그리고 1949년 7월, 묘역을 만든 백범 자신도 이곳에 잠들었다.

하지만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세력을 눈엣가시로 여긴 이승만 정권은 이곳에 축구장인 '효창운동장'을 조성하는 등 그 가치를 훼손하려 했다. 박정희 정권도 다르지 않았다. 효창공원에 골프장을 지으려다 반대에 부딪히자 이곳에 '반공투사 위령탑' 을 세우고 대한노인회 건물을 짓는 등 어울리지 않는 기념물을 지어 본연의 의미를 훼손시켰다.

이곳에 대한 성역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 당시 효창운동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효창공원을 독립기념공원화하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축구계의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고 말았다. 박근혜 정부 때인 지난 2013년에는 당시 민주통합당 김광진 의원의 주도로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승격해야 한다는 내용의 법률안이 발의되기도 했지만, '집값 하락' 등을 우려한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역시 흐지부지됐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8월, 국가보훈처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효창공원을 독립운동의 정신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재조성하라"는 보훈혁신위원회의 권고를 수용해 효창공원의 성역화를 결정했다. 여기에는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효창공원 성역화 의지를 자주 내비친 문재인 대통령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로 차씨는 손목에 '이니시계'(문재인 시계)를 차고 다닐 정도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고마운 감정을 갖고 있었다. 차씨는 "문 대통령은 변호사 시절부터 개인적으로 효창원을 자주 찾았다"라면서 "선열들의 무덤이 이렇게 방치되고 있는 현실에 일찌감치 문제의식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효창공원의 성역화는 그의 평생 숙원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기쁨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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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조씨가 손목에 차고 있던 '이니시계'. 시계에 문재인 대통령의 이름이 선명하다. ⓒ 김경준 

"하루 빨리 어머니를 현충원에 모시고 싶다"

효창공원 성역화라는 국가적·민족적 숙원은 해결됐지만, 그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개인적인 소원이 하나 더 남았다. 바로 모친 홍매영(1913~1979) 여사의 서훈 문제다.

홍매영 여사는 중국 충칭에서 차리석 선생과 혼인해 1944년 차씨를 낳았다. 당시 홍 여사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뒷바라지를 도맡고 있었는데, 이 모습을 기특하게 여긴 백범이 차리석 선생과의 중매를 주선했다고 한다.

당시 홍 여사와 차리석 선생의 나이 차이는 무려 32살이었다. 그러나 홍 여사는 군말 없이 백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차씨는 차리석 선생이 늘그막에 본 늦둥이 외아들이었다. 홍 여사는 남편인 차리석 선생이 이국 땅에서 눈을 감자, 홀로 아들을 업고 고국으로 돌아와 키웠다. 이에 대해 중매를 주선했던 백범도 내내 미안해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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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12일, 중국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차리석 선생 장례식 사진. 앞줄 가운데 아기를 안고 있는 이가 부인 홍매영 여사이고 품에 안긴 아기가 바로 차영조씨다. ⓒ 독립기념관 

그러나 홍 여사는 여전히 서훈을 받지 못한 상태다. 차씨는 보훈처에 어머니에 대한 서훈 심사를 요청했으나 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다"라면서 거부당했다.

차씨는 "그 엄혹한 환경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게끔 뒷바라지를 한 것도 독립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증거가 없다면서 거부하는 게 말이 되느냐"라면서 보훈처의 결정에 서운함을 드러냈다.

그는 현재 보훈처에 재심사를 요구한 상황이다. 차씨는 "문재인 정부 들어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발굴 의지가 높아진 만큼 이번엔 기대를 걸고 있다"라며 "최하위 등급이라도 좋으니 부디 어머니에 대한 서훈이 이뤄져 국립현충원에 모시고 싶다"라는 간절한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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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차영조씨 ⓒ 김경준 


9일 인터뷰를 하는 내내, 차씨에게서 효창공원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 기간 동안 정부기념식 참여도 거부했다.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세력들과 나란히 서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신 그는 "기념식이 열리는 동안 효창원에 들러 선열묘역을 참배했다"고 한다.

"나는 효창원이 내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부모님 두 분 모두 이북에서 태어나셨고, 중국 충칭에서 나를 낳으셨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을 맞이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향이 따로 없습니다. 내 아버님 잠들어 계신 바로 이곳이 나의 고향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뵙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와서 아버지를 뵐 수 있어서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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