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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서울신문]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독립 탄원… 항일투쟁 외교 전선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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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1-03 15:07 조회4,31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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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외무총장·부주석 역임 김규식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이 천명한 민족자결

주의는 나라를 빼앗긴 약소국들을 독립의 희망에 부풀게 했다. 그런 배경에서

같은 해 8월 중국에서 민족지도자들이 발족한 신한청년당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로 했다. 파리에 대표로

간 인물이 김규식이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김규식은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

하고 국제 정세에 밝아 적임자였다. 김규식은 파리로 떠나기 직전 결혼한 김순애

바로 이별해야 했다. 여운형과 김순애 등은 국내외 각지로 가서 파견 경비를

모으는 한편 한국 대표의 외교활동에 힘을 실어 주려면 대규모 독립운동이 필요

하다고 알렸다. 이런 활동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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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이 파리에 도착한 것은 국내에서 일제의 탄압 속에 만세운동이 계속되던

1919년 3월 13일이었다. 김규식의 임무는 회의석상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비망록을 제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전승국인 일본의 방해로 애당초 불가능

했다. 이를 예상한 김규식은 치밀하게 준비한 계획에 따라 움직였다. 먼저 파리

샤토가 38호에 한국공보국을 설치했다. 각국 대표와 인터뷰를 하고 언론, 정당은

물론 사회주의 조직과도 접촉했다. 그를 통해 일제의 죄악상을 폭로하고 독립의

정당성을 홍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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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 문제 국제적 부각… 동정 여론 형성

한국공보국은 공보국회보를 발간하고 ‘한국독립에 대한 탄원서’를 회의에

제출했다. 김규식이 만났던 미국 인사는 외교관이자 언론인인 스티븐 본잘

이라는 사람이었다.

본잘은 한국에 호의적이기는 했지만 결정권이 없었다. 그의 대답은 “우리가

유럽에서 전범을 응징하면 나중에 국제연맹이 일본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도였다.

김규식은 좌절하지 않았다. 조르주 클레망소 강화회의 의장에게 임정 대통령

이승만 명의의 서한을 전달했다. 김규식이 파리에 머물던 4월 11일에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돼 대표단 지원사업은 임시정부로 이관됐다. 임정은

공보국을 임정 파리위원부로 개칭하고 김규식을 임정 외무총장 겸 파리위원

부위원장으로 임명해 힘을 실어 주었다. 김규식은 4월 26일에는 ‘통신국회보’를

발간해 3·1운동 등 독립운동 소식을 알렸다. 한일합병의 무효화 등을 요구하는

20개 항목을 담은 독립공고서를 비롯한 서한을 강화회의 이사회 위원들과 각국

정부에 여러 차례 보냈다.

달걀로 바위 치기 같았지만 김규식의 다각적인 노력에 침묵을 지키던 유럽 신문

들이 움직여 기사를 싣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규식의 활동은 열강들의 외면으로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 문제를 국제적으로

부각시키고 동정적 여론을 형성하는 간접적인 성과는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사(尤史) 김규식은 1881년 1월 29일 부산 동래에서 김지성과 경주 이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구한말 선전관을 지낸 부친은 일제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누명을 쓰고 귀양을 갔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 김규식은 사실상

고아가 됐다. 큰아버지 집에 맡겨졌지만 형편이 어려워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어린 나이에 고난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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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美 유학… 박사과정 장학생 접고 귀국길
 

그를 구한 사람은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였다. 그의 아내 릴리아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언더우드는 분유와 약을 들고 가마를 타고 아이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 아이는 너무 굶주려서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내어 삼키려고

까지 했다.” 언더우드는 병든 김규식을 극진히 보살피고 입양했다. 5세 때 김규식은

언더우드가 세운 고아학교(경신학교)에 입학했는데 영어를 대단히 빨리 익혀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어 1894년 한성 관립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학교를 졸업한 김규식은 독립신문사에 입사하고 독립협회에도 가입했다.

김규식은 16세가 된 1897년 서재필의 권유와 언더우드 후원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동부 버지니아주 로노크대학에 입학했다. 예과를 2등으로 마치고 본과에서도

전 과목 평균 90점 이상을 받았다. 외국어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전교강연

대회에서 2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스스로 학비를 조달해야 했지만 1903년 전체

3등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졸업한 해 가을 그는 프린스턴대학원에 장학생

으로 입학, 1년 만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과정

장학생으로도 선발됐지만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귀국을 결심하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김규식은 은인인 언더우드 목사를 돕는 일부터 시작했다. 언더우드의 비서와 주일

학교교장직을 맡으면서 새문안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거기에 안주할 수

없었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105인 사건’을 일으켜 독립운동가와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구속했을 때 투옥은 모면했지만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심해졌다.

김규식은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참여할 결심을 굳혔다.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

고자 호주로 간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상하이로 향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때는

32세 때인 1913년 4월 중순이었다. 신규식, 박은식 등이 창설한 동제사(同濟社)가

프랑스 조계에 설립한 박달학원에서 일할 기회를 얻어 중국에서의 첫걸음을 떼었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돼 임무를 마친 김규식은 임정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으로

임명돼 1919년 8월 22일 미국으로 건너갔다. 구미위원부는 대한민국을 대표해

외교 활동을 벌이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사실상 정부 기능을 수행했다.

김규식은 미국 국무부 당국자들에게 독립운동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윌슨과

관리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냉대를 받았다. 구미위원부는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대중 연설이나 홍보물 배포, 신문·잡지 기고 등의 간접적 활동을 폈다. 이는 미국

정치인들에게 영향을 미쳐 1920년 3월 미국 상원에 한국 독립안이 상정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김규식은 1921년 1월 상하이로 돌아가 임정에 합류했다. 그러나 임정의 내부

갈등에 염증을 느껴 구미위원부 위원장과 학무총장을 사임하고 한중호조사(韓中

互助社)를 창립해 한중 합작으로 항일운동을 벌였다. 1921년 극동피압박민족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규식은 참가를 결정했다. 고비사막을 횡단

하고 러시아 이르쿠츠크를 거쳐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막된 회의에 참석했다.

50여명이 참가한 한국대표단은 레닌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았다. 중국으로 돌아온

김규식은 복단·동방·북양대학 교수로 일하는 한편 삼일중학을 세웠다.

●독립단체 통합 참가, 민족혁명당 국민부 부장에

1925년부터 김규식은 독립운동 계파 통합을 위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가했지만

결실을 보지 못하자 교육에만 열중했다. 1935년 7월에는 난징에서 한국독립당,

의열단 등 5당 통합으로 창당된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과 국민부

부장으로 선임됐다. 1942년에는 좌우익 세력을 대표하는 한국독립당과 광복군,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가 임정을 중심으로 통합했다. 사천대학에서 후학을 양성

하던 김규식은 충칭 임시정부로 와서 국무위원과 선전부장으로 선임됐다. 1944년

에는 임정 부주석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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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에도 그의 통합정신은 이념과 노선을 초월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으로

이어졌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란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9월에

납북당했다. 평북 만포진까지 끌려간 김규식은 그해 12월 10일 동상과 천식 등으로

고통받으며 69세를 일기로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1989년 김규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고모이기도 한 부인

김순애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손성진 기자 sonsj@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