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편지 속 필체, 강한 인내력과 결단력 보여줘"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일제강점기 대만에서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육군 대장 척살에 나서 당시 일본을 충격에
빠뜨린 조명하(1905∼1928년) 의사의 유일한 친필 기록물이 발견됐다.
조명하 의사 연구회장인 김상호 대만 수핑(修平)과기대 교수는 2일 조 의사가 1927년
11월 직접 쓴 편지 사진을 입수했다면서 연합뉴스에 제공했다.
이 편지 사진은 1928년 8월 일본 도쿄출판이 펴낸 '역사 사진'이라는 제목의 화보집에
포함돼 있었다.
김 교수는 대만에서 백방으로 조 의사의 생전 활동 기록을 찾는 과정에서 대만 기자 출신
칼럼리스트인 천러우진(陳柔縉)씨가 소장 중이던 이 화보집을 얻었다.
화보집 발행 당시의 주요 역사 사건을 기록한 '역사 사진' 화보집은 조명하 의사 사건을
다룬 별도의 페이지에 조 의사의 친필 편지 사진을 실었다.
일본에 유학하던 조 의사는 대만으로 건너온 1927년 11월 7일 오사카(大阪)의 친구인
김태준(金泰俊)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일본어로 편지를 썼다.
조 의사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려고 보내는 이의 이름을 '아케가와 도요다케'(明河豊雄)
라고 적었다.
편지에는 "가을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그동안 여러모로 불편을 드렸습니다. 생활 속에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소생은 선생 덕분에 바다와 육지 여행 길은 모두 별일 없었습
니다. 안심하셔도 되겠습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편지는 안부를 전하는 평범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지금껏 발견된 조 의사의 친필 기록이
전무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김 교수는 "조 의사는 자신의 의거로 가족에게 화가 미칠 것을 걱정해 일본과 대만에 있는
동안 황해도의 고향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읽고는 반드시 태워 버리라고 할 정도로
자신의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은 독립운동가"라고 설명했다.
그는 "화보집에 개인 간의 편지가 어떻게 공개된 것인지 경위가 나와 있지는 않지만 조
의사의 의거 직후 일제 경찰이 조 의사가 다녔던 학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태준을
찾아내고 그 편지를 확보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독립운동 조직에 속하지 않고 단독 의거에 나선 조 의사는 사진과 서한 등 자신의 삶에
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은 독립운동가다.
이런 탓에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의거 못지않게 조 의사의 의거가 당시 일제에
큰 충격을 안겼음에도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잊힌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필적 전문가인 구본진 변호사는 조 의사의 편지를 보고 "이(異), 귀(貴)에서 보듯이 가로
선이 매우 긴데 이는 강한 인내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문(門) 등에서처럼 마지막
부분에서 꺾어서 쓰는 것은 결단력과 끈질긴 성격을 보여준다"며 "전체적으로 필압이
강한 글씨여서 강한 에너지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일제의 식민 체제에 순응해 안정적인 삶을 살아갈 수도 있는 조 의사는 황해도 신천군
서기직을 걷어차고 갓 태어난 아들과 부인을 고국에 남겨둔 채 일본을 거쳐 대만으로
건너가 '타이중(臺中) 의거'에 나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다.
조 의사는 이번에 발견된 편지를 쓴 이듬해인 1928년 5월 14일 삼엄한 경비를 뚫고
독을 바른 단도를 들고 타이중시 도로에서 자동차를 타고 지나던 구니노미야 대장을
급습했다.
일본 경찰과 검찰은 조 의사가 경호관에게 가로막히자 던진 단도가 구니노미야를 맞히
지는 못했다고 발표했지만 구니노미야는 이듬해 1월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구니노미야는 일본 '황족'의 일원으로 당시 일왕의 장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군부와
정계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실력자였다는 점에서 당시 대만 총독이 경질될 정도로
조의사의 '타이중 의거'가 일본에 준 충격은 컸다.
조 의사는 거사 직후 체포돼 그해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 사형장에서 스물셋의
나이로 순국했다. 타이베이 도심에는 조 의사가 순국한 타이베이 형무소의 옛 담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 연합뉴스 차대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