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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뉴스메이커]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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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5-25 16:53 조회7,30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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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중략-

 

이상설안중근의 스승이자 배후로 알려지다

가해자 안응칠(안중근 의사)은 3년 전(1906당시 배일 목적의 교육에 종사하던 이상설을

 찾아가 문하생이 됐다이상설은 안응칠이 가장 존숭(尊崇)하는 자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18791910)와 헤이그 특사로 성명회 선언서를 주도했던 이상설 선생

(18701917)의 사상적 연대를 엿볼 수 있는 사료가 나왔다일제강점 초기 독립지사 탄압의

주범인 아카시 모토지로 헌병대사령관(18641919)의 비밀보고서가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

됐다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석형)는 4월 19일 근대사다큐멘터리 제작사 더채널

김광만 PD와 함께 일본 외무성 공문서관과 러시아 극동문서보관소 하바롭스크 도서관에

잠자고 있던 한국주차군 참모장 아카시 모토지로 보고를 찾았다고 밝혔다이 기밀문서는

 안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를 사살하고 체포된 뒤 일제 스파이의

대부로 불리던 아카시가 작성했다현대로 치면 중장급 참모장이던 그가 직접 중국으로 건너

가 밀정들을 진두지휘해 만든 보고서다일제가 안 의사의 배후세력을 찾기 위한 사전 작업

성격이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 하면 현지에서 분사한 이준 열사가 먼저 떠오르지만 사실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은 정사로 활약한 이상설(1870~1917)이다무엇보다 그는 1906년 망명 후부터 1917

이국 땅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해외에서 일제에 저항한 독립운동가였다

 

이상설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해 6살 때 동부승지 이용우

의 양자로 입적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24세 때인 1894년 조선조의 마지막 과거(갑오문과)

급제하고 성균관 관장한성사범학교 교관탁지부 재무관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다.


이상설은 전통 학문인 유학은 물론 정치·법률·경제·사회·수학·과학·철학·종교 등 신학문에도

일가견이 있었다특히 1899년 집필을 끝낸 수학서 수리에 정현(正弦·sin)’, ‘여현(餘弦·

cos)’, ‘정절(正切·tan)’ 등 삼각함수 공식이 소개되어 있을 정도로 조선의 수학사에 남긴 발자

취가 선명했다. ‘수리에는 방정식과 연립방정식이 기호화되어 있고 제곱근을 포함한

2차방정식의 ()의 공식도 오늘날과 같은 기호로 정리되어 있다. 1900년 집필한

 산술신서는 한성사범학교의 교재로 쓰였다.


이상설은 1905년 11월 초 의정부 참찬(2)에 발탁되었으나 며칠만에 을사조약이 체결

(11.17)되자 적극적으로 고종에게 상소했다. “대저 그 약관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아니해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순사

(殉社)의 뜻을 결정하여 단연코 거부하여 열조열종(列祖列宗)의 폐하께 부비(付卑)하신 중임

(重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직설했다. 11월 22일 고종이 외부대신

박제순을 의정대신으로 승격시켰을 때는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 수괴를 의정대신 대리로

임명해 신에게 그 아래 반열에 나가게 하니신은 분노가 가득 차고 피가 텅 비며 뜨거운 눈물

이 강처럼 흘러 정말 갑자기 죽어서 모든 것을 잊고 싶습니다라고 항의했다.

 

을사조약 체결(1905후부터 3·1 운동 발발(1919전까지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 남겨 


민영환이 11월 30일 을사조약에 항의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종로 네거리로 달려가

땅에 머리를 찧으며 자결을 시도했다김구는 백범일지에 민영환의 집에 조문 갔다 나오면서

목격한 이상설의 자살 미수 사건을 기록으로 남겼다. “어떤 사람이 흰 명주 저고리에

갓망건도 없이 맨 상투 바람으로 옷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가면서 큰소리로 울부짖었다누구냐고 묻자 참찬 이상설인데 자살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이상설은 1906년 4월 중국 길림성 용정으로 망명하고 그해 8월 이동녕·정순만 등과 함께 항일

근대 민족 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설립했다서전서숙은 서양 선진 문명의 수용과 관계있

는 근대 교육과 더불어 철저한 반일 민족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독립군 양성소

와 같은 역할을 했다이상설은 숙장을 맡아 산술을 가르쳤다안중근 의사가 1906년 8

고향을 떠나 용정으로 간 것도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상설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정사로 참석하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준을 만나 헤이그로 향했다. 1907년 7월 이준

열사의 분사 후에는 헤이그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 한인들에게 조선의 실정을 호소하고

 독립 자금의 지원을 요청했다미국에 체류 중이던 8월 8일 일본 정부 압력 하에 놓여 있던

대한제국의 재판소는 궐석 재판을 열어 이상설에게는 사형을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징역

을 선고했다.


이상설은 9월 초 헤이그로 돌아가 이준의 장례식을 거행한 뒤 유럽 각국을 순회하다 1908

 2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년 남짓 머물렀다. 190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서는

1910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러시아령 내의 의병 세력이 ‘13도 의군을 결성할 때

힘을 보탰다. 1910년 7월에는 유인석과 공동 명의로 고종에게 내탕금으로 군자금을 지원하

고 고종이 직접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영도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1910년 8월에는 유인석·이범윤 등과 함께 을사조약 무효를 주장하는 항일 단체 성명회

조직했다.

일제는 이처럼 러시아에서 맹렬하게 항일을 주도하는 인물들의 체포와 인도를 요구했다.

러시아는 8월 30일 이상설을 비롯해 성명회와 13도 의군의 주요 인물들을 체포하고 일부는

중부 시베리아 지역으로 유배했다.

 

내 몸과 유품글을 모두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은 석방 후 니콜리스크(우스리스크)로 추방되었다가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그해 5월 최재형·홍범도 등 연해주 지역의 핵심 인물들과 뜻을 모아 권업회를 조직했다.

연해주는 물론 간도 지역의 인물들까지 참여시켜 급속히 세를 확대했다창립 당시 최재형을

회장홍범도를 부회장으로 선임했던 권업회는 1911년 12월 총회 때 조직을 개편해 의사부와

집행부로 나누고 의사부 의장 이상설이 권업회를 대표하도록 했다.


권업회는 표면적으로는 상공업 등 실업 활동을 권장했지만 민족 교육과 한인 사회의 정치·

경제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했다권업회의 기관지로 1912년 4월 창간된

권업신문은 강력한 항일 논설과 애국 논설로 동포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1914년 초에는 연해주를 비롯해 북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을 규합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러일전쟁 10주년을 맞아 제2의 러일전쟁이 발발할 것

을 기대하고그때를 광복의 기회로 삼으려는 전략에서 시도된 것이었다이상설은 정도령

(正道領)으로 추대되어 부도령 이동휘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지휘했다대한광복군정

부는 권업회가 양성한 광복군을 기반으로 하고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독립전쟁을

추진했다그러나 1914년 8월 1차대전 발발 후 러시아가 동맹국인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여

모든 항일 민족운동 단체를 탄압해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권업회와 함께 1914년 9월 해체되

고 말았다.


이후 중국 상해로 이동한 이상설은 상해의 신규식·박은식북경의 유동열·성낙형 등과 함께

1915년 3월 신한혁명당을 결성했다본부장에는 이상설이 추대되었고 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