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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중부일보] [항일현장에서 미래를 그리다] 들불처럼 번진 '대한독립만세'… 성남의병의 불씨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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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3-13 10:10 조회5,04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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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의 힘겨운 사투로 힘겨운 3월이지만, 남도에서 올라오는 매화꽃 핀 소식은 새 희망을 갖게 한다. 하루에도 수십만대의 차량이 오가는 경부고속도로 성남 판교IC 방면 백현동의 낙생공원, 이곳에 매화향기 같은 성남항일의병기념탑이 서있다. 판교신도시가 들어선 복잡한 도심가에 6m 거대한 탑이 생뚱맞아 보이지만, 이곳은 일본군을 떨게 했던 남상목·윤치장 등 항일의병들이 태어나 자라고 1919년 3월 목숨을 건 독립만세시위가 펼쳐진 역사의 현장이다.

남상목(南相穆)은 1876년 4월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에서 태어나 한학을 수학하여 주역과 병서에도 조예가 깊었다. 나이 29세이던 1904년 2월 일제가 러일전쟁을 일으켜 고향마을의 울창한 수목을 무기자재로 쓰기위해 벌채를 하면서 인생향로가 바뀌었다. 일제는 낙생면과 언주면·돌마면 3개 면민을 동원해 벌채하는 한편, 주민들에게 이를 운반하는 작업을 시켜놓고 노임을 지불하지 않았다. 이에 남상목이 일본인 감독관을 폭행하며 항의하자, 일본헌병대가 그를 체포해 온갖 체형을 가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항일의병의 길을 걷게 되었다.

더구나 을사늑약으로 나라의 외교권마저 빼앗기며 망국에 직면하자, 대왕면과 돌마면·낙생면 등의 주요 길목마다 의병들이 봉기에 나섰다. 남상목은 고향마을에서 의병을 모집하다가 충북 제천에서 이강년이 봉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2월 그의 의진에 참여하였다. 곧바로 전개된 음성전투에 참전하였는데, 비록 패했지만 격전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이어 군대해산으로 전국적 의병운동이 전개되던 1907년 8월경 용인의 용천곡(龍泉谷-오늘날의 백암면 용천동) 일대에서 부대를 조직하였다. 휘하 의병의 판결문에 의하면, 이 무렵 남상목은 휘하에 50여명을 인솔하였고, 무기도 구식총 40자루와 신식총 10자루를 갖추고 있었다. 남상목 의병장은 의병 30여 명을 이끌고 안성(당시 죽산)의 칠장사에 거처하였다. 이후 전봉규 휘하에 있는 100여 명과 진을 합해 안성에 주둔한 일본군과 접전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던 중 1908년 11월 판교에 살고 있던 가족을 만나러가다 일제 앞잡이의 밀고로 인하여 느릿골이란 지역에 잠복해 있던 일본헌병에게 피체되었다. 모진 고문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남상목은 복역하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생긴 장파열로 1908년 11월 4일에 순국하였으니 33세의 일이었다.

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당시 대왕면 금토리) 태생인 윤치장(尹致章, 1876~1972) 역시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에 분개하여 고향에서 거병하였다. 그는 동지 70여 명을 규합해 광주군 일대에서 일본 기병대와 전투를 벌여 나갔다. 그의 활동은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무리 수백명을 이끌고 과감하고 능숙하게 공격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고 기록될 정도였다. 그는 양주일대에 나아갔는데, 서울에서 탄약을 구입하려다가 1909년 1월 2일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의병들에 의해 피어난 항일의 불씨는 10년 후인 1919년 3월 대한독립만세의 들불로 번져나갔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와 조선헌병대사령부에서 남긴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에 의하면, 현재의 성남시에 해당하는 대왕면·낙생면·돌마면·중부면 등 전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먼저 1919년 3월 26일 광주군 중부면 소재지가 있는 산성리에서 대한독립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때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200여 명이다. 이날 일제는 관내 일본인들에게 ‘민심의 동요가 심하고 불안상태가 있어’ 폭행이 발생하면 각자 자위를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음날인 27일 시위는 새벽부터 중부면 성남출장소 관내 단대리·탄리·수진리 주민 300여 명이 주도하였다. 시위대는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횃불을 밝힌 것을 신호로 산성 남문에 집결해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면사무소로 진격하였다. 시위대는 평소 일제에 협력한 중부면장이 시위 자제를 요청하자 그를 끌어내 곤봉으로 폭행해 30일간의 치료를 요하는 중경상을 입혔다. 결국 경비 중이던 일본 헌병이 총기를 발사해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돌마면과 낙생면에서도 27일 새벽부터 29일까지 3일간 치열한 만세항쟁이 일어났다. 고종의 독살설이 파다한 가운데 서울 장례식에 참석해 서울시위를 목격한 돌마면 율동 출신의 천도교 신도인 한백봉(韓百鳳, 당시 35세)은 이웃 낙생면의 초대면장인 남태희(南台熙, 당시 53세)를 만나 함께 거사하기로 계획하였다. 낙생장이 열리는 3월 27일 새벽부터 봉화를 올리고 5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수내동·야탑동 등 각지를 순회하며 시위대 600여명을 모아 면 소재지인 판교리로 진출하였다. 한백봉 등은 밤이 되자 다시 산에 올라 봉화를 올리고 28일과 29일에도 충돌 없이 계속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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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9일 돌마면과 낙생면 일대의 연합시위는 약 3천여 명에 이르렀다. 일제의 기록에는 시위대에 의한 폭행이나 파괴행위는 없었으며, 시위자는 보통의 백성들로 보고되었다. 그럼에도 일제는 남한산성 안에 주둔 중인 헌병 1개 소대를 파견해 무력진압에 나서 한백봉 등 수십명을 판교헌병주재소로 연행하였다. 한백봉은 남한산성 용인헌병분견대 광주분견소로 이송되어 4일간의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 후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을 거쳐 서대문감옥에 이감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복역하였다.

성남 3·1만세운동의 주역인 한백봉·한순회·이대헌 등은 출옥 후에도 1927년 전 민족적 항일협동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해 광주지회장을 역임하는 등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코로나19 공포와 경기침체로 인해 어느 때보다 힘겨운 봄날, 국란과 불의에 굴하지 않고 매화꽃처럼 절개를 지킨 항일 의병과 3·1만세운동 주역들의 백절불굴·멸사봉공의 선비정신을 되새겨 본다.

글·사진=김명섭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