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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한국역사문화신문] 우수리스크 라즈돌노야 강가의 이상설 선생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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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4-03 11:14 조회7,2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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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라즈돌노야 강가의 이상설 선생 유허비

 

우수리스크 라즈돌노야 강가의 이상설 선생 유허비 낙농업 도시로, 별다른 관광지가 없는 우수리스크는 고려인과 독립운동가들의 궤적이 굵직하게 수놓인 곳이다. 대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재 이상설을 빼놓을 수 없다. 이상설은 우수리스크에서 생을 마감했고 라즈돌나야 강가 어디쯤에서 불꽃이 되어 하늘로 돌아갔다. 선생을 기리려고 2001년, 대한민국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라즈돌나야 강가에 이상설 유허비를 세웠다. 고혼이라도 강물 따라 고향으로 가기를 바라는 동지들의 염원과 이상설의 불꽃같은 삶을 담아낸 소중하고 감사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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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바람이 급하고 강 물결이 목맺히니

3월 말. 러시아 사람들은 장갑과 모자로 중무장했다. 라즈돌나야강(중국 표현으로는 쑤이펀강) 그늘진 곳에도 오래전 내린 눈이 군데군데 얼어 있다. 그래도 계절은 참으로 기민하다. 얼마 전까지 얼음에 갇혀 있었다던 강물이 바람을 등에 지고 기운차게 달린다. 100여년 전, 보재 이상설 선생이 이 강가에서 세상과 영영 이별하던 날의 풍경도 이랬을 것이다. 1917년 5월, 신한민보(미주 한인 민족단체인 국민회 기관지)가 실은 <리샹셜 공을 됴상> 제목의 기사가 아리다.

 

시베리아의 바람이 급하고 오슈리 강의 물결이 치니 오호라 우리 공이 길히 갓도다

 

오슈리강은 우수리강의 당시 표현인 것 같은데 라즈돌나야강의 착각이지 싶다. 다만 바람도 급하고 강물도 목맺힌다는 표현이 선생이 떠나던 날의 스산함을 잘 말해주는 듯하다. 이상설 선생은 운명하면서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겼다.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한 몸으로 고국에 묻힐 수 없으니 시신은 화장하고 광복 전까지는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내용이다. 동지들에게는 낙심하지 말고 조국 광복을 이루라고 당부했다. 선생의 유언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있는데 세부적 표현이 조금씩 차이 난다. 누구는 화장한 재를 강물에 뿌리라 썼고 누구는 바다에, 또 누구는 시베리아 들판에 버리라 썼다. 분명한 것은 조국 광복을 이뤄내지 못했으니 죽어서도 고향에 갈 면목이 없다는 지사의 굳은 절개이다. 선생이 임종할 때 곁을 지킨 동지들?이동녕, 백순, 조완구, 이민복 선생 등은 라즈돌나야 강가에 장작을 쌓고 보재 선생을 화장했다. 조완구 선생으로부터 임종 전후 사정을 자세히 들은 권오돈 선생은 그 비통함을 기록으로 남겼다.

 

…장례는 선생의 유언으로 화장하게 되었는데 그곳 러시아의 풍속은 화장법이 없었으므로 화장장이 없었다. 그래서 동지 여러분은 선생의 영구(靈柩)를 마차에 모시고 멀리 흑룡강가로 나아가서 장작을 높이 쌓고 그 위에 영구를 모시고 불을 질렀던 것이다. 아 그 당시 그 불을 달리던 동지의 손이 얼마나 떨렸을까. 그들의 눈물이 그 불을 끄지 못한 것이 이상한 일이다… (<윤병석, 이상설전, 일조각, 1984>에서 재인용)

 

가슴 먹먹하게 하는 이 글에도 약간의 오해가 있다. 흑룡강은 하바롭스크에 있는 아무르강의 다른 말로 우수리스크의 라즈돌나야강과는 다른 곳이다. 이상설 선생은 1916년, 하바롭스크에서 지낼 때 병을 얻었다. 이 무렵 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는 일본과 동맹을 맺고 한인들의 활동을 탄압했다.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등 이상설 선생이 몸담았던 독립운동 단체도 진작에 해체했다. 시대로부터도 외면받은 탓일까, 선생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다. 동지들은 상대적으로 따뜻한 우수리스크로 선생을 모셔왔고 고국에 연락해 10여 년간 생이별했던 가족의 상봉도 주선했다. 그러나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한 선생은 1917년 봄날의 문턱에서 눈을 감았고 동해로 흘러드는 강가에서 이승의 무거운 짐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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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도 죽어서도 조국의 수호신

‘우수리스크 시내에서 우체스노예 방향의 라즈돌나야 강변’. 여행 안내자에게 유허비가 있는 곳의 정확한 주소를 묻자 돌아온 답이다. 특정 지명이나 지번이 없이 그저 강변이라는 주소가 쓸쓸하다. 유허비가 서 있는 풍경도 쓸쓸하기는 마찬가지다. 도로에서도 눈에 보일 정도로 가깝지만, 그 길은 자동차의 왕래마저 뜸한 인적 없는 곳이라 허허롭다. 길지 않은 진입로는 온통 흙길인데 여름에 비라도 쏟아지면 질퍽거려서 자동차가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그래도 지금은 러시아를 찾는 한국인 여행객이 많아지면서 이상설 유허비를 찾는 발길도 잦아졌다 한다.

 

유허비의 존재를 알고 찾아오는 이도 있지만, 차를 타고 지나다 한국인 단체 관광객을 보고 우연히 들르는 이도 있다. 몇 해 전에는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의 후손이 찾아와 이상설 선생께 절을 올렸고 대통령 영부인도 꽃을 바쳤다. 유허비를 찾았던 날도 우수리스크 시내의 최재형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한 보훈처장이 참배를 하고 간 뒤였다.

 

유허비는 유물이나 유적은 없지만 자취가 서린 곳에 세우는 기림 비(碑)라고 사전은 설명한다. 선생이 세상과 작별한 곳에 유허비가 들어선 것은 2001년의 일이다. 대한민국 광복군과 고려학술문화재단이 함께 세웠는데, 러시아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고국에서 가져온 화강암으로 제작한 2m가 넘는 유허비의 비문은 이상설 연구자인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가 썼고 조각은 김경순 작가가 맡았다. 유허비의 설립 과정을 잘 안다는 여행 안내자가 알려준 사실이다. 그이는 비석이 담고 있는 뜻도 설명했다. 비석이 직선 모양인 것은 이상설 선생의 올곧은 선비 정신을 표현한 것이고, 네 면에 새겨진 불꽃 모양의 문양은 선생의 불꽃같은 삶과 동해로 흘러가 조국의 수호신이 되었을 선생을 동시에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그이는 수호신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추운 남의 땅에서 고난 속에 독립운동을 벌였던 지사들은 살아서도 조국의 수호신이었고 혼이 되어서도 조국의 수호신이 되었을 것이다.

 

근대 수학과 자연과학의 선구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이상설 유허비 사진을 보여주자 망설임 없이 돌아온 대꾸. 그러나 이 수식어는 이상설이라는 우주를 담기에 남루하기 짝이 없다. 어릴 때부터 교과서에서 헤이그 특사 이상설을 배우지만 실상 그에 대해 아는 것은 그리 깊지 않다. 교육의 단편성을 탓할 마음은 없다. 선생이 자신의 유고가 미완성이라 부끄럽다며 없애버린 것도 큰 이유인 까닭이다. 조카 완희 씨는 이동녕 선생이 이상설의 유언을 거스르지 못하고 면전에서 유고와 유품을 불태운 일을 평생 후회했다 전한다. 그래도 다른 이의 글이나 후학의 연구 덕분에 이상설 선생의 면모를 알게 된다. 후대의 학자들이 밝혀낸 것 중 대표적인 것은 선생이 우리나라 근대 수학의 개척자라는 사실이다. 이상설 선생은 20대 중반에 성균관 관장이 되며 수학을 정규 교과과정에 반영했고, 이후 『수리(數理)』, 『산술신서』 등의 수학책을 완성했다. 특히 『수리』에는 당시 동아시아 수학에는 없던 개념들이 많이 들어 있다. 자연과학에도 조예가 깊어 식물학, 화학, 물리학 등의 과학책을 읽다가 새로운 부분을 발췌, 필사하여 묶기도 했다. 이 책들은 선생의 사위인 이민복의 형이자, 연해주에서 함께 활동했던 이승복이 신학문을 공부하려고 불태우지 않고 보관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것은 이상설의 면모를 밝히는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선생에 대한 진술도 값지다. 안 의사는 1909년 여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이상설 선생이 세계 대세에 능통하고 애국심이 강하며 특히 동양평화주의에 있어서는 가장 친절한 마음을 가졌다고 상찬했다. 선생이 얼마나 다채로운 인물이었는지 짐작케 하지만 이 또한 진면목을 밝히는 데는 일부분일 터, 이상설 선생에 대한 평가와 조명이 더욱 새롭고 풍성해지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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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문화신문 기자 fountex@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