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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이데일리] 21일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1주기 추모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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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항단연 작성일17-02-20 09:56 조회8,5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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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30분, 청주시 단재 사당에서 열려

[이데일리·김관용 기자] 대일 항쟁기 언론인 및 사학자로서 민족의식 고취에 힘쓴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을 기리는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1주기 추모기념행사’가 21일 오전 10시 30분 단재신채호선생 사당 및 묘정(청주시 낭성면 귀래리 소재)에서 열린다.

신채호 선생(1880~1936)은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어남리(現 대전 중구 어남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유교학문 수양에 힘썼으나 1898년 성균관에 입학한 후 개화사상을 접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해 적극 활동했다. 

21일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1주기 추모기념식
신채호 선생 [이데일리DB]
1905년 4월에 성균관 박사가 됐지만 바로 사직했다. 그 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 진출을 포기하고 ‘황성신문’에 논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양기탁의 요청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약하며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민족이 힘쓸 것을 역설했다. 
 
1907년 안창호, 이갑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 ‘신민회’의 창립에 참가해 신민회의 이념을 논설에 반영하는 등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했다. 선생은 그 해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기호흥학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언론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에 주력했다. 뿐만 아니라 ‘독사신론’을 비롯한 많은 역사 관련 서적을 저술해 근대민족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1910년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무관학교 설립, 교관 양성 등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다. 1911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교민단체인 ‘권업회’를 조직하고 기관지인 ‘권업신문’의 주필로서 재러동포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권익을 옹호하는 등 항일언론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후 만주 일대의 고구려, 발해 유적지를 답사하는 등 국사 연구와 문필 활동에 힘쓰던 선생은 1919년 4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해 의정원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이후 중국 북경을 중심으로 상해, 천진 등을 무대로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집필 등 역사연구에 힘쓰던 선생은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무정부주의동방연맹’ 활동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해 대만으로 가다가 일제에 체포돼 뤼순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1936년 옥사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