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몰연도 및 훈격
이종호(李鍾浩, 1885~1932), 건국훈장 독립장(1962)
김학만(金學萬, 생몰년 미상), 건국훈장 애국장(1912)
최봉준(崔鳳俊, 1859~1917), 건국훈장 독립장(1996)
◆ 공적상세
□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이종호, 김학만, 최봉준 선생을 2021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ㅇ 이종호, 김학만, 최봉준 선생은 러시아 지역에서 권업회(勸業會)를 결성하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항일운동을 펼치신 분들이다.
□ 1911년 6월 1일 이종호, 김익용, 강택희, 엄인섭 등이 발기하여 그해 12월 정식 창립된 권업회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위한 경제 단체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은 ‘조국독립’이라는 권업회의 최고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표면적인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그 명칭을 권업회라 한 것은 일제의 의심을 피하고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다.
ㅇ 권업회의 활동 중에 주목을 끄는 것은 기관지 「권업신문」의 발행이다. 이 신문의 발행 목적은 권업회 사업 홍보를 넘어서 항일 민족 언론으로 도약이었다. 신문은 권업회 지회와 분사무소를 통하여 연해주 구석구석의 한인마을까지 보급되었다. 또한 신문사 사원을 직접 한인마을로 파견하여 동포의 애국정신과 민족의식 고취에 큰 역할을 하였다.
□ 이종호(李鍾浩, 1885~1932)는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고종의 측근인 이용익의 손자이다. 그는 조부의 ‘광건학교(廣建學校, 널리 학교를 세워 인재를 육성함)’의 유지를 이어받아 전국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거나 학교 경영을 지원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ㅇ 이종호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을 당시 연해주에는 한인의 자치기관인 권업회가 막 태동하고 있었다. 이종호는 권업회 설립에 참여하여 1911년 12월 창립총회에서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이를 계기로 권업회의 조직과 「권업신문」의 발간에 가장 중요한 재정적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ㅇ 이후 이종호는 상해로 갔으나 1917년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어 , 고향인 명천에서 1년 여 감금된 생활을 했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보성전문학교를 다시 찾으려는 노력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셋방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던 이종호는 1932년 3월 28일 부인 장계인 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누추한 임정(林町) 257번지 단칸방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종호 선생의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김학만(金學萬, 생몰년미상)은 함남 단천 출신으로 최재형, 최봉준과 함께 ‘강동의 영웅 3걸’로 불리웠고, 초기 연해주 한인사회의 주요 지도자로 한인사회 안정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던 인물이다.
ㅇ 김학만은 1910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거류민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그해 8월 경술국치 소식이 전해지자, 개척리에서 이상설 등과 성명회를 조직하였으며, 일제의 한국 강점 부당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성명회선언서>에 서명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렸다.
ㅇ 1911년 12월 19일 권업회 창립총회에서 김학만은 최재형 등과 함께 총재로 선출되었다. 이때 김학만은 중국 밀산현 봉밀산 일대에 독립군기지 개척을 위해 한인정착촌인 한흥동 건설사업을 적극 추진했고, 1919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대한노인동맹단에서도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김학만 선생의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최봉준(崔鳳俊, 1859~1917)은 함경북도 경흥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8세 되던 해에 부모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하여 한인 최초 이주지인 치신허(地新墟)에 정착했다. 1880년 두만강변 녹둔도 근처인 향산동에 새로운 촌락을 개척하였다. 향산동 개척에 성공한 최봉준은 주민들에 의해 마을 민장(대표)로 추대되었다.
ㅇ 이 시기부터 러시아 군대에 군용품을 공급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최봉준은 함경도 일대의 소를 주로 러시아에 수출했다. 최봉준은 1903년 일본 기선을 임대해 매월 3회 이상 원산-성진-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며 소 무역을 확대해 나갔다. 그 와중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군납업 사업이 더욱 발전되어 많은 재산을 소유한 자본가로 성장하였다.
ㅇ 최봉준은 자신의 사업에 진력하면서도 연해주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해 힘을 쏟았다. 1911년 권업회에도 많은 활동을 했다. 그는 12월 19일 권업회 창립총회에서 최봉준은 특별임원으로 최재형 등과 함께 총재로 선출되었다. 권업회가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창간하자 신문에 기부금을 보내 간행을 지원하였다. 또한 권업회 지방지회가 설치되자, 연추지회의 의사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7년 9월 질병에 걸려 9월 25일 사망하였다. 그는 추풍 허커우 정교당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최봉준 선생의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