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몰연도 및 훈격
박원희 (朴元熙 1898 ~ 1928), 건국훈장 애족장(2000)
김영순 (金英順 1892 ~ 1986), 건국훈장 애족장(1990)
조복금 (趙福今 1911 ~ 미상), 건국훈장 애족장(2018)
◆ 공적상세
□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박원희·김영순·조복금 선생을 2022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ㅇ 근우회의 창립은 한국근대여성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 박원희 선생은 대전에서 태어나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부설 사범과를 졸업했다.
1921년 김사국과 결혼 후 함께 일본으로 3년간 유학하였다.
ㅇ 1924년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여성동우회를 조직하고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ㅇ 1925년 초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의 여성단체인 경성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이를 이끌었다.
ㅇ 1926년 말에는 화요회계 여성단체인 경성여자청년동맹과 함께 통합적 사회주의 단체인 중앙여자청년동맹을 탄생시켰다.
이는 근우회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 김영순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였다.
ㅇ 1915년 군산 메리볼덴 여학교 교사로 있다가 2년 후 모교인 정신여학교 사감으로 옮겨왔다.
ㅇ 이곳에서 1919년 결성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ㅇ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1919년 9월에 이르러 김마리아 등을 중심으로 결사부·적십자부를 새롭게 꾸리는 등 조직을 탈바꿈하였다.
ㅇ 이때 선생은 서기에 선임되어 활약하였으나 1919년 11월 그 조직이 드러나면서 선생도 함께 체포되어,
ㅇ 1920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ㅇ 출옥 후 태화여자관 교사를 거쳐 정신여학교 사감으로 재직하였으며, 1927년 근우회 창립을 이끌었다.
□ 근우회 창립총회에서 21명의 집행위원이 선출되었으며, 박원희, 김영순 선생도 집행위원이 되었다.
ㅇ 박원희, 김영순 선생은 총회에 참여하여 근우회 활동 청사진이 될 8개 항을 결의하였다. 이날 부서 결정이 이루어졌는데 두 선생은 황신덕?김동준과 함께 교양부를 맡았다.
ㅇ 박원희 선생은 신간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신간회 본부의 정기대회 준비 활동, 신간회 경성지회 활동이 확인된다.
ㅇ 그러나 선생은 병고로 1928년 1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ㅇ 김영순 선생은 신간회 창립 및 제1회 집행위원회 활동 이후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박원희와 함께 교양부를 맡아 여성의 지위향상과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다
□ 조복금 선생은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났다.
ㅇ 1926년 1월 진주여자잠업강습소를 졸업하였다.
ㅇ 이후 경남 하동에서 여성 청년단체 및 근우회 활동을 이끌었고, 1928년 3월 개최된 하동청년동맹여자지부 제1회 정기대회에서 제영순과 함께 서무재정부 역원으로 선출되었다.
ㅇ 전국적인 통일기관이었던 근우회는 지역의 지회 결성에 노력하였다.
ㅇ 전국적으로 69곳의 지회가 결성되었다. 하동에도 1928년 7월 근우회 하동지회가 결성되었고, 선생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박원희 선생에게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영순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조복금 선생에게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