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몰연도 및 훈격
박건병(朴健秉, 1892-1932) 독립장(1993)
강경선(康景善, 1891-1930) 독립장(1995)
배천택(裵天澤, 1892-미상) 애국장(1991)
◆ 공적상세
□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1920년대 중국 북경과 상하이 등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통합한 단체인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이하‘촉성회’)결성에 참여한 박건병·강경선·배천택 선생을 2022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 강원도 김화 출생(1892년)의 박건병 선생은 1919년 5월 서울에서 결성된 임시정부 지원단체인 대한독립애국단 소속 강원도 철원군단(鐵原群團, 일명 철원애국단)에서 학무국장으로서, 임시정부를 선전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벌였다.
ㅇ 상하이로 망명 후 192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4년 8월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 결성에 참여하여 기관지인 ‘도보(導報)’의 집필진으로 참여, 강력한 투쟁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을 강조하기도 했다.
ㅇ 1927년 북경에서 관내 촉성회 연합회가 결성되자 15인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8년 5월 만주에서 전민족유일당 조직 촉성회가 개최되었을 때 북경대표로 참석했다.
ㅇ 하지만, 촉성회는 1928년 5월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면서 활동이 위축되었고, 1929년 해체 수순을 밟았다.
□ 1891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강경선 선생은 1920년 12월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의 간사로 활약했고, 1921년 11월 대한적십자회에서 상의원(常議員)에 선출됐다.
이후 중국 안동현(安東縣)에 있는 이륭양행을 통하여 국내 정보를 수집해서 임시정부에 연락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ㅇ 이후 상하이 상해대한교민단(上海大韓僑民團) 의원을 맡아 활동했고, 1926년 인성학교에서 교감으로 후진양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1924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ㅇ 북경지역에서 한국유일독립당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상하이지역에서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자들이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하는 등 1927년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설립에 기여했다.
ㅇ 선생은 촉성회에 참여하여 25명의 집행위원 중에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의 활로 모색을 위해 적극 노력했다.
□ 경북 대구 출생(1892년)의 배천택 선생은 1919년 중국 류하현(柳河縣)에 있는 군정부(軍政府)가 서로군정서로 개편될 때 참여했고,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의 3인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가, 비서장(?書長)에 선출됐다.
ㅇ 또한, 1926년 7월 북경에서 북경촉성회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창립선언서를 기초하였고, 1927년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 결성에 참여하여 15인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5인의 상무위원으로도 활동했다.
ㅇ 하지만, 1929년 촉성회가 해체되자 선생은 1930년 2월 북경에서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 결성은 물론, 1932년 상하이에서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창당과 1934년 난징에서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결성에도 참여하여 당시 중국지역에서 진행된 정당통일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 박건병·강경선·배천택 선생은 중국지역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하나 된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한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박건병 선생은 1993년, 강경선 선생은 1995년 각각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배천택 선생에게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