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몰연도 및 훈격
김상태(金尙台, 1862-1911) 독립장(1963)
신태식(申泰植, 1864-1932) 독립장(1968)
김동신(金東臣, 1871-1933) 독립장(1977)
◆ 공적상세
□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1907년 일제의 고종 강제퇴위, 정미조약 강제체결, 군대해산 등으로 일어난 정미의병에서 항일 구국(救國)운동을 펼친 김상태(1963년 독립장)·신태식(1968년 독립장)·김동신 선생(1977년 독립장)을 2022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 충북 단양 출생(1862년)의 김상태 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선포에 항거하여 경북 문경에서 이강년 의진(의병진영) 중군장으로 의병에 참여했고, 이강년과 함께 유인석의 제천의병에서도 활동했다.
ㅇ 선생은 1907년 정미의병이 발생하자, 제천·단양 일대의 의병을 규합하여 이강년 의진에 합류했고, 이강년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한 후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의병을 이끌었다.
그해 9월부터 10월까지 문경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으나, 12월 전투에서 패전하여 이강진 의진이 해산되자, 1908년 영남지역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ㅇ 1908년 이강년이 순국하자, 선생이 이끌던 의병과 이강년 의진의 남은 병력까지 모아서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가 만나는 요충지인 단양군 지역에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일본군을 공격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ㅇ 그러나 1911년 6월 풍기군에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고,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9월 순국했다.
□ 1864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신태식 선생은 1895년 을미의병이 발생하자 문경 농암(籠岩)장터에서 문경과 상주 지역의 일제 밀정을 처단했다.
ㅇ 이후, 1907년 정미의병이 봉기하자 단양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아 도대장(道大將)이 되어 이강년 의진과 합류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뒤 울진과 평해로 이동하여 신돌석과 함께 삼척에서 활동했다.
ㅇ 1908년 9월 홍주 전투에 참여했고, 12월 포천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체포, 1909년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상고하여 10년으로 감형되어 1918년 출소했다.
ㅇ 선생은 출소 후인 1920년 9월 독립운동의 재정 후원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의 경상북도 단장을 맡아 군자금을 모금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지원하기도 했다.
ㅇ 하지만 1922년 11월 의용단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1922년 대구 감옥에 수감,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 김동신(1871) 선생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자주 왕래하여 무주와 용담 등 영호남 일대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활동했고, 1907년 8월, 8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기삼연, 고광순과 함께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ㅇ 민긍호의 지원으로 선생의 의진은 강화되었고, 구례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무기를 노획했다.
또한 순창 우편취급소와 분파소를 공격하는 등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이후 의진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각지에서 의병들이 합류하여 약 1,000여 명에 이르는 부대로 규모가 확대되었고, 선생은 충청·전라·경상도를 아우르는 삼남의병대장으로 불렸다.
ㅇ 1908년 2월, 일제는 선생을 체포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펼쳤으나, 선생의 의진에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생은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잠시 고향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던 중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김상태·신태식·김동신 선생은 1907년 정미의병이 봉기하자, 일제에 맞서 본인의 안위(安位)보다는 나라를 위해 항쟁을 펼치신 분들이다.
□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김상태 선생은 1963년, 신태식 선생은 1968년, 김동신 선생에게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각각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