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고운기는 1907년 함경남도 문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공진원이며, 고운기는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시절 신분을 숨기기 위해 사용했던 이름이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공진원이 아닌 고운기란 이름으로 서훈을 받았다.
그는 1931년 말 만주의 한국독립당이 창설한 한국독립군의 제6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32년에는 중국군의 대표들을 만나 한중연합부대 합작을 성사시켰다. 이후 한중연합군은 경박호전투, 동경성전투, 대전자령전투 등지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1933년 말 김구는 한인 청년들을 군사간부로 양성하기 위해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고,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에게 입학을 권유하였다. 고운기는 1934년 2월 동료들과 함께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여 병기학ㆍ전술학ㆍ통신학 등 각종 군사훈련을 받았다.
1938년 11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대장을 맡아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선전활동을 주도하였다. 1939년 임시의정원 함경도 의원, 1940년 한국독립당의 감찰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정식 군대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제2지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제2지대장으로 임명된 후 서안을 거쳐 내몽고 지역으로 파견되어 한국광복군 대원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중경으로 돌아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한국광복군의 자율적인 활동을 제한하던 ‘9개준승(準繩)’을 취소시키는 활동을 전개하다가 병을 얻어 1943년 37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군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