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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청산리대첩에서 활약한 나중소 장군(羅仲昭, 1867.4.13.~1928.8.18.)을
2016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경기도 고양군(현재 서울 정릉) 출신으로 16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副尉)로 재직 중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 당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등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19년 3월 선생은 북간도 왕청현에서 서일 등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정의단의 교관으로
초빙되어 수백 명의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참모부장에 임명되어 사령관 김좌진을 보좌하며 부대를
이끌었다.
선생은 북로군정서군의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300여 명의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였으며, 청산리대첩에 참전하여 백운평과
천수평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청산리대첩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 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 정예군대와 10여 차례 벌인 전투였다. 1,300명의 독립군 연합부대는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뒀다.
청산리대첩 후 선생은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이만 지역으로 이동하여 1921년 4월 36개 독립군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대한독립단 참모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이 일어나자 선생은 북만주로
돌아왔다.
1922년 1월 안도현 군인양성소 사령관에 임명되어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였으며, 같은 해 8월에는 9개 독립군 단체들의
군사통일체로 대한독립단을 재건하고 전 만주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24년 3월 대한군정서가 재조직되었고, 선생은
서무부장 겸 참모에 임명되었다.
1925년 3월 영안현에서 신민부가 조직되자 선생은 중앙집행위원회 참모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9월 신민부와 정의부의 연합부대에서 간도의 훈춘, 장백 및 함경도 등을 관할하는 서남로향관(餉官)에 임명되었다.
선생은 1928년 8월
신민부 지방조직을 설치하던 중 돈화현 산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독립군 양성과 청산리대첩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나중소 장군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