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오산학교, 서전서숙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서로군정서 부독판, 임시정부 간서총판부 총판으로 활동한 여준 선생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62년 죽산군 원삼면(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한문을 공부한 선생은 성년이 되어 서울에서 이상설, 이회영, 이시영 등과 어울려 신학문을 섭렵하였으며, 1896년 성균관 직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선생은 이상설, 정순만, 이동녕 등과 함께 민중의 애국사상고취를 위한 교육계몽의 필요성을 깨닫고 민족교육활동을 통한 구국운동 방략을 계획했다.
1906년 이상설 이동녕 선생 등이 북간도로 망명하여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연길현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이듬해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자 선생이 제2대 숙장이 되어 서전서숙을 이끌어나갔다. 그러나 민족교육을 실시한다는 이유로 통감부 간도파출소의 감시와 방해가 심해지고 재정난이 겹쳐지자 3개반 74명을 단기 속성과정으로 졸업시키고 1907년 8,9월경 폐교하게 되었다. 서전서숙은 1년여의 짧은 기간 동안 존속하였으나 이후 간도 지역 민족교육의 선구가 되었다.
이후 선생은 국내로 돌아와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계속하였고,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되는 한편, 1908년 용인 원삼면 죽릉리에서 삼악학교를 세워 신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선생은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설립된 신흥무관학교에서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탁 등과 함께 신흥학교 유지회를 구성하여 학교의 재원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이상룡의 뒤를 이어 교장에 취임하여 학교의 운영을 전담하는 등 독립군 양성을 위한 민족교육에 매진하였다. 선생의 이와 같은 노력으로 청산리전투는 물론, 독립군, 광복군의 핵심 인재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선생은 1917년경 신흥무관학교 교장에서 물러나 길림으로 옮겨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9년 대한독립의군부의 정령으로 추대되어 박찬익?김동삼?김좌진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고, 같은 해 3월, 길림에서 ‘길림군사독판부’의 단장으로 무장투쟁을 추진해 나갔으며, 이탁과 함께 부민단 유하현을 맡아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같은해 4월 상해 임시정부 수립 후 ‘한족회’가 임시정부 산하 군정부인 ‘서로군정서'로 편입되자 부독판을 맡아 참모부장 김동삼, 사령관 지청천 등과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12월, 선생은 임시정부 간서총판부 총판에 선임되어 서간도지역 독립운동단체 규합과 임시정부의 개조를 위해 노력하였고, 1922년, 자신이 최고의 독립운동 방략으로 생각한 교육활동을 위하여 액목현에 검성중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이어 1930년 7월 북만주 위하현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에서 일흔에 가까운 나이에도 고문으로 활동하는 등 1932년 만주사변 와중에 서거하기 까지 일생을 독립군 양성과 항일투쟁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