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독립운동가 이만도(李晩燾)선생
(1842. 1. 28 ~ 1910. 10. 10)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ㆍ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명성황후 시해 후 예안 선성의진을 결성하였으며, 을사조약 파기와 을사오적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경술국치에 이르자 병탄에 항거하여 단식 순국한 이만도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퇴계의 11세손으로 경북 봉화군 봉성면에서 태어나 14세 때 선대 고향인 안동도 산면 하계마을로 돌아왔다. 24세가 되던 1866년 정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합격한 후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장령과 지평, 사간원 사간 등의 청직(淸職)을 지냈다.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1876년, 선생은 최익현이 개항을 반대하여 올린 상소를 두둔하여 파직 당하였으며, 1882년 한미수호조약으로 나라가 혼란하자 낙향한 뒤, 같은 해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다시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몰두하던 중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이에 서상철이 거병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선생은 왕의 명령이 없는 거병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마침내 9월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왕의 밀령이 전달되자 선생은 거병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소모관 이용호가 일본군에 붙잡히는 바람에 뜻을 중단할 수밖에없었고, 선생은 조상의 묘역인 일월산 자락으로 은거했다.
이듬해인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 소식까지 들려오자, 안동지역에서는 통문이 돌기 시작했다. 선생은 가장 앞선 예안통문에 참여하고, 의병을 일으켜 대장을 맡아 선성의진을 이끌었다. 그러나 의진이 구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안동의진이 패하자 선성의진이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대장에서 물러나 의진을 정비하였고 집안 후손인 이중린, 이인화, 이중언 등이 이를 이어 3월 태봉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선생은 아들 이중업을 통해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 다섯 역적의 목을 베소서’라는 상소를 올리며 을사늑약 파기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후, 선생은 상소를 올린 뒤 영양 일월산 서북쪽 산촌으로 들어가은거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 9월 17일 단식을 시작했다. 나라를 잃고 군왕이 치욕을당하게 된것에 대해 죽음으로 책임을 다하고자 함이었다. 단식 21일째 되던 날, 경찰이와서 강제로 음식을 먹이려 하자 선생은 크게 소리쳐 꾸짖으며 그들을 물리쳤다. 10월10일(음 9.8) 선생은 단식 24일째 되던 날, 순국했다. 선생의 순국은 후손들에게 거대한 규범이자 지켜갈 길이었다. 동생 만규는 의병에 참가하고 파리장서에 서명하였으며, 아들 중업은 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참가하고, 아버지를 여읜 뒤 1910년대에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나라가 무너질 때, 선비가 걸었던 길은 대개 다음의 세 가지였다. 외침에 맞서 싸워 오랑캐를 어낸다는 ‘거의소청(擧義掃淸)’, 적절한 곳을 찾아 유교적 규범을 보존한다는 ‘거지수구(去之守舊), 부해거수(浮海去守)’, 스스로 목숨을 끊는 ‘치명수지(致命遂志), 치명자정(致命自靖)’, 선생은 순서대로 위의 세 가지 길을 모두 선택한 인물이다.
처음에는 의병을 일으키고, 다음으로는 은거에 들어갔고, 끝내는 목숨을 끊었다. 죽음을 통해 국권피탈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 선생의 절의는 민족적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으며, 선생은 쓰러져 가는 조선의 진정한 선비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