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제천의병에서 전군장으로 활약한 안승우 선생을 2016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선생은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유학자 가문에서 태어나 화서학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생은 1896년 일제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던 망국적 위기상황에서 강원도 원주에서 거의를 선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제천으로 옮겨 이필희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선생은 군중 사무를 총괄하는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의 직책을 맡았다.
이때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을 발포하여 전 국민에게 의병에 대한 지지와 응원을 호소하였다.
제천의병은 단양으로 진군하여 관군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896년 2월 화서학파의 종장인 의암 유인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의병 연합전선을 구축하였다. 선생은 전군장을 맡아 의병의 선봉을 이끌었다.
제천의병은 관군과 일본군이 다수 집결해 있던 군사적 요충지 충주성을 공략하여 장악하고 서울로 북상할 기반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제천의병은 관군과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전력이 크게 소실되고, 보급로도 차단당하자 3월 초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의병의 전열을 정비하고 문경의 이강년 의병장 등과 함께 충주, 단양 등지에서 일본군 병참 기지를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관군이 의병의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제천의병은 일제와 결탁한 집권세력이 개화정책을 수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결코 의병을 해산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5월 26일 관군이 제천성을 공격하자 선생은 최일선에서 의병을 지휘하여 여러 차례 관군을 물리쳤으나 우천으로 화승총을 쓸 수 없게 되면서 제천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선생은 전투 중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어 타살 당하였다. 선생의 중군 종사로 있던 19세 청년 장수 홍사구도 스승을 지키다 장렬히 순국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애국헌신과 충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