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대동단의 제2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신애 李信愛(1891.1.20.~1982.9.27.) 선생을 2016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이신애는 평북 구성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한 살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따라 원산으로 이사하였으며, 이후 개성 호수돈여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낮에는 편물로 학자금을 벌고 밤에는 학업에 전념하던 중 결핵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자 학교를 중퇴하였다.
건강을 회복한 이신애는 1914년 성경여학교에서 공부한 후 1918년 루씨여학교 두산리분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무렵 부흥회에서 손정도 목사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5월부터 혈성부인회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보낼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1919년 9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처단하기 위해 서울로 들어온 강우규를 은닉해 주고 군자금을 모집해 의거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였다.
또한, 1919년 9월 초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하여 부인단 총대에 선출되었다. 당시 대동단은 1919년 10월 초 조직 본부를 상해로 옮기기 위해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망명시키고자 하였다.
아울러 상해 임시정부의 특파원 이종욱 등과 연계해 제2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국내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11월 11일 일행이 만주 안동역(오늘날 단동역)에서 체포되면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일경의 체포망에서 벗어난 이신애와 나창헌 등은 만세운동을 다시 추진하고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의친왕 이강과 여성대표 이신애 등 33명이 서명하였다. 11월 28일 오후 5시 경 이신애는 동료들과 함께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안국동 경찰관 주재소 앞 광장에서 선언서를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행인들이 모여들기도 전에 일제 경찰은 이신애 등 만세운동 참가자를 체포해 갔다.
종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이신애는 1920년 3월 1일 서대문형무소 같은 동에 있던 유관순 등과 3.1운동 1주년을 맞아 옥중에서 만세를 부르다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정부는 대동단의 여성대표로 제2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