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영화 '아리랑'을 제작한 독립군 출신 영화감독 나운규 선생(羅雲奎, 1902~1937)을 2016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함북 회령 출신으로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간도의 명동중학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함북 회령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다일경의 수배를 받게 되자 연해주를 거쳐 북간도로 이동하였다.
3.1운동 이후 간도지역의 무장독립운동이 활발할 때 선생은 철도, 통신 등 일제의 기간시설 파괴 임무를 띤 도판부(圖判部)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였으며, 청산리 인근에서 독립군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철도 파괴 계획에 대한 비밀문서를 입수하고 선생을 비롯한 관련자들을 체포했다. 선생은 1921년 3월 보안법위반으로 2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 회령에 머물던 선생은 1924년 1월 극단 예림회에 가입하여 연극배우로 활동하였다. 이후 부산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연구생으로 입사하였고, 윤백남의 백남프로덕션에서 '심청전'의 심봉사 역을 맡아 연기하였다. 이후 '흑과백', '장한몽', '농중조'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1926년 선생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영화 '아리랑'을 제작하여 당대의 현실 문제를 이야기하였고, 일약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았다. 이어 '풍운아', '잘있거라', '사랑을 찾아서' 등을 제작하였다. 특히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시기의 경험을 토대로 제작하였던 '두만강을 건너서'는 일제의 엄격한 검열로 제목을 '사랑을 찾아서'로 바꿔야 했다.
그러나 1931년 '말 못할 사정' 이후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자 폐병이 악화되었다. 선생은 병중에도 '오몽녀'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으나 병은 급속도로 악화되어 1937년 8월 9일 향년 36세로 사망했다. 영결식은 '아리랑'이 개봉되었던 단성사에서 열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시대였기에 만드는 영화마다 일제의 검열 가위에 잘려나가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에도 선생은 영화를 통해 조선인 관객들을 울고 웃게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선생의 영화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이를 위한 실천이 깔려 있었다. 1993년 정부는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