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춘천의병장 습재
이소응(李昭應, 1852~1930) 선생을 2017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52년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자는
경기(敬器), 호는 습재(習齋) 또는 사정거사(思靖居士)이며, 후에 의신(宜愼), 직신(直愼)으로 개명하였다. 본관은 전주로,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별자(別子)인 경창군(慶昌君) 주의 후손이다.
선생은 1872년 22세 때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유중교의 문하에 들어가
일생을 화서학파 선배인 의암 유인석과 항일투쟁에 매진하였다. 조선이 1876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자 면암 최익현 등 화서학파 유생들과
반대 상소를 올려 일제의 침략성을 규탄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선생은
유인석의 권유로 의병 대열에 동참하여 1896년 춘천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춘천의병진에는 전직 관료와 재야 유생을 비롯하여 군인, 보부상, 농민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선생은 의병진의 전열을 재정비하고 군량과 무기를 확보하는 한편, 효고팔도열읍(曉告八道列邑)이란 격문을 지어 의병을
일으킨 목적과 정당성을 천명하고 백성들의 참여와 원조를 독려하였다.
춘천의병은 관찰사로 부임한 친일 관료를 처단하고 서울로
진격하고자 하였으나 경기도 가평에서 패전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제천 유인석 의진에 입진하고, 이들과 함께 1898년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지에서 항일의지를 다지던 선생은 1900년 의화단 난을 계기로 유인석과 함께 귀국한 뒤 후학 양성과 제천의
자양영당(紫陽影堂) 건립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경술국치 후 일제의 핍박이 극심해지자 1911년 서간도로 다시 망명하였다. 철저하게 수의(守義)
생활을 고수하던 선생은 심양 외각 강평현(康平縣)에서 79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선생은 화서학파의 항일사상을 실천에 옮긴 학자이자, 나라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였다. 선생의 유해는 1934년 제천으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